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생애와 신학사상
1. 초기
2.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3. 로마서 주석의 저술과 그 파장
4. 주요 저술
5. 후기
Ⅲ. 나가는 말
본문내용
신학자들에게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기독교 사상가를 한 사람 꼽으라면 이견없이 칼 바르트를 들 것이다. 전 생애 동안 현대 교회의 교부로서 널리 인정받았던 그는 신학에 기여한 대규모적이며 독창적인 공헌 때문에 종종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칼빈, 그리고 슐라이어마흐와 함께 분류되곤 한다. 실제로 모든 20세기의 신학자들은 어떻든 그에 대하여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느껴 왔다.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신학을 분석해 보려는 새로운 논문과 책들이 세계 각지에서 계속 나오고 있다. 바르트의 지속적인 중요성을 논하기 위한 학자들의 회의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는 가운데, 1986년에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신학자들의 특별 모임이 열리기도 했다.바르트 신학이라는 ‘학파’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서구의 수많은 신학자들은, 의식적으로 바르트의 기본적인 신학에 동화하고 있으며 그들 나름대로 그것을 계속 잇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한 사람 에버하르트 융엘(Eberhard Jüngel)이 1982년에 쓴 글의 결론 부분에서 논한, 그의 위대성에 대한 진술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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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는 1886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설교자들을 양성하는 대학(오늘날의 신학교와 비슷함)의 교수였고 스위스 개혁 교회 내의 상당히 보수적인 그룹과 어울렸다. 바르트가 두 살 때 그의 아버지는 베른 대학교의 조교수라는 훨씬 명망있는 자리를 수락하게 되었다. 바르트의 가정생활은 엄격했지만 전반적으로 행복했다. 훗날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대단히 존경했고 어머니를 깊이 사랑했었노라고 회상했다.1902년 바르트는 견진례(confirmation)를 받기 전날 밤 신학자가 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설교와 목회를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당시 그가 희미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그렇게 결심했다. 그는 베른, 베를린, 튜빙겐, 마부르크 등의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 결국 자유주의 사상 가운데 리츨 학파의 신학 사상을 따르게 되었다.
참고 자료
Eberhard Jüngel, Karl Barth, A Theological Legacy, trans. Garrett E. Paul(Philadelphia: Westminster, 1986), 22.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공저, 「20세기 신학」, 신재구 역(서울: IVP,1997), 99-100.
Karl Barth,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trans, Douglas Horton(Boston: The Pilgrim Press, 1928), 43.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공저, 「20세기 신학」, 101.
Karl Barth, 「로마서 강해」, 조남홍 역(서울: 한들, 2000),
G. C. Berkouwer, The Triumph of Grace in the Theology of Karl Barth, trans, Harry R. Boer(Grand Rapids, Mich.: Eerdmans, 1956), 279.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공저, 「20세기 신학」,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