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 첨부]강화도조약과 개화정책 그리고 위정척사파의 반발
- 최초 등록일
- 2015.07.24
- 최종 저작일
-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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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말 위정척사사상가들의 지지를 받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개항을 늦추긴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고종은 친정 이후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최익현의 지부상소ㆍ영남만인소 사건ㆍ임오군란 등 보수적인 당시 민중과 유생들의 많은 반발을 사 저지당하였다. 그리하여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은 서양의 법과 제도를 적극 받아들여 근대 사회를 이룩하고 근대 국가를 세우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그들의 위정척사사상은 후에 항일 의병운동으로 이어졌고, 개화사상은 갑오개혁ㆍ독립협회에 영향을 끼쳐 한국 근대 사상사에 큰 흐름을 이루었다.
목차
1. 머리말
2. 흥선대원군의 실각과 고정의 친정
3. 운요호사건과 강화도조약의 체결
1) 강화도조약 사료
2) 최익현의 지부상소 사료
4. 고종의 개화정책과 그 후폭풍
1) 김기수의 일동기유 사료
2) 황쭌센의 조선책략 사료
3) 이만손의 영남만인소 사료
5. 맺음말
본문내용
머리말
18세기 조선 후기 사회는 세도정치로 정치 및 사회가 문란해지기 시작했고 바깥으로는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해 배상금 및 홍콩을 빼앗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연해에 이양선이 자주 출몰하면서 반외세 성격을 띤 위정척사사상이 싹트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섭정이후 쇄국양이정책을 고수하였으나 고종의 장성으로 실각하였고, 조선은 일본의 포함외교로 강제 개항되게 된다. 개화사상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을 전후로 하여 형성된 정치사상으로, 서구 문명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개화사상을 가진 이들이 정치세력인 개화파를 만들었으며, 급진개화파는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 정변을 일으켰다.
흥선대원군의 실각과 고종의 친정
흥선대원군이 시행한 서원 철폐와 호포제 실시, 경복궁 중건에 따른 원납전의 반강제적 징수와 조상들을 모신 묘지 주변의 우람한 나무들을 베어간 일련의 개혁정책들은 유학자들의 많은 반발을 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73년 최익현을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이 ‘임금이 20대가 되었으니 나랏일을 직접 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였고, 흥선 대원군은 여론에 떠밀려 고종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집권 10년 만에 정계에서 하야했다.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을 고수하던 대원군이 실각하고 개화에 우호적인 고종과 민씨 일파가 정계에 들어서게 되자 조선 후기 북학파의 후신인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의 통상개화론자들이 부국강병을 위해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고종 또한 개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대외정책에 변화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참고 자료
신편 한국사 38권, 국사편찬위원회, 2000
신편 한국사 37권, 국사편찬위원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