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의 군주적 면모
- 최초 등록일
- 2015.11.12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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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BC 1세기 이집트의 왕위계승분쟁
Ⅲ. 클레오파트라의 집권기
ⅰ) 카이사르와의 관계
ⅱ) 안토니우스와의 관계
Ⅵ. 클레오파트라의 정치적 역량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2000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유혹’하면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그 많은 시간동안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군림하며, 지금까지도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인물은 이집트 최후의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 7세이다. ‘악녀’, 또는 ‘유혹’의 대명사로 불리는 클레오파트라는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특히 클레오파트라를 소재로 한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은 그녀의 무기를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 하나인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라는 희곡에서는 그녀가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고, 유혹에 빠진 안토니우스의 몰락을 그린다. 또한 1963년에 개봉한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도 당시 가장 아름다운 미모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 역을 맡으면서, 클레오파트라의 아름다움을 구체화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클레오파트라가 역사 속에서 맡은 역할은 두 남자를 파멸시키는 것이었고, 그것을 설명하기 쉬운 것은 역시 아름다움이 결부된 성적매력이었다. 두 권력자를 손에 쥐고 흔들었던 그녀의 능력을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승자의 역사라는 이론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역사 속에서 패배자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클레오파트라의 비극적 결말이 현재까지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클레오파트라를 기록한 플루타르코스(Plutarchos)는 그녀가 사망한 뒤 76년이 지난 뒤에서야 태어났고, 아피아누스는 100년, 디오(Cocceianus Dio Cassius)는 200년이 지난 뒤에야 글을 썼다. 또한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는 좋은 역사가를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그녀의 평가가 왜곡되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여러 요인 하에 클레오파트라는 ‘나일 강의 마녀’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클레오파트라의 정치적 능력이나 군주적인 면모는 ‘악녀’와 ‘창부 여왕’으로 덮여버렸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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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시 시프, 『더퀸, 클레오파트라』, 21세기북스, 2011.시부사와 다츠히코, 『세계 악녀 이야기』, 삼양미디어, 2009.
유인경, 『세계 악녀들의 유희』, 백양출판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