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진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 발표자료
- 최초 등록일
- 2015.11.21
- 최종 저작일
- 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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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Ⅱ. 15세기의 수리정책(水利政策)과 수리시설
1. 고려 말・조선 초의 수리정책과 그 성과
2. 慶尙道續撰地理志 堤堰 기록의 분석
Ⅲ. 15~16세기의 저평지・저습지 개간 동향
1. 15세기의 연해지역 개간 추세
2. 16세기 저평지 ․ 저습지 개간의 형태
3. 저지 개간의 동인(動因)과 주체
본문내용
Ⅱ. 15세기의 수리정책(水利政策)과 수리시설
1. 고려 말・조선 초의 수리정책과 그 성과
1) 고려 말의 수리정책의 한계
고려 시대에는 전・후기를 막론하고 전반적으로 수리에 관한 기록이 적다. 고대부터 기록에 나오는 수리시설들 가운데는 규모가 큰 것도 있는데 벽골제는 신라 때 처음 축조되었지만, 그 사이 결궤된 상태에서 고려 인종 때 권농정책의 일환으로 신축되었다.
인종은 농업지대로서 가능성이 높은 군현을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현령관으로 바꾸어 중앙정부의 재정확충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 중앙집권적 농업정책이 지방 세력으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어서 결국 벽골제 신축 제언을 결궤시키도록 하였다. 이 사례로 볼 때, 고려시대에 중앙집권적 수리정책의 한계를 알 수 있으며 수리시설에 새로운 변화가 없는 한 수전 농업 자체에도 획기적인 발전이 상정되기 어렵다.
13세기 말, 14세기 초에 농업은 농경지가 미고지(微高地)에서 저평지로 이동하는 큰 변화를 치르고 있었다. 농경지가 저평지로 이동함에 따라 저평지 수리시설이 새로운 과제로 던져졌다. 공민왕 11년(1362) 밀직제학 백문보가 차자를 올려 수차(水車) 보급을 건의했다. 우리가 도랑으로만 관개를 하고 있다는 것은, 수고답저(水高畓低) 제언 관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이것에만 매달리지 말고 중국에서처럼 하천수를 관개수로 사용하는 방식을 도입하기를 강력히 요청했다.
백문보는 경작지들을 쓸모 있는 수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중국 강회(江淮)지방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차의 방식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근원적인 기술의 선후진 문제가 아니라 농업환경의 변화가 새로운 기술을 주목하게 만든 것이다. 고려 말기는 경지 변동으로 새로운 수리정책의 필요성은 많이 느끼고 있었지만, 아직 그것을 체계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2) 조선 태종대의 제언(堤堰) 수축정책과 그 한계
제언 보급에 대한 건의나 대책 모색은 태종대에 들어와 비로소 활기를 띤다. 태종 14년(1414) 이은이 상서를 올리고 이를 왕과 신하들이 찬동하여 본격적인 제언 보급대책이 이루어졌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