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생애와 문학을 엮어 그의 생애를 짐작하여보자.답사시행과 답사후기
- 최초 등록일
- 2015.11.29
- 최종 저작일
- 20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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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3. 답사후기
본문내용
1. 서론
1조는 2015년 6월6일 토요일날 부산 해운대 동백섬에 위치한 최치원의 동상에 문학답사를 가게되었다.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문장가이자 학자로,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다. 그는 신라 말기 육두품으로 당나라에서 인정받은 유학자였으나 신라의 골품제도로 인해 큰 뜻을 펼치지 못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그는 몇 차례 신라를 위해 항소문을 냈으나 이는 기각(棄却) 되었다. 그는 이러한 아둔한 신라의 정치체계를 보고 자연에 벗 삼기로하고 흔적을 감춘다. 그러다 석학 고운 최치원 선생은 동백섬에 들리게 되는데, 그 절경이 너무 아름다워 떠나지 못하고 머무르며 동백섬 남쪽 암벽에 자신의 자(字) '해운(海雲)'에서 따와 세 글자를 음각함으로써 이곳의 지명이 해운대(海運臺)라고 정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본론에서는 최치원의 생애와 그의 작품들을 몇 개 보고, 느낀점을 서술해보자.
2. 본론
그의 답사지에서는 그의 생애에 대한 돌이 3개 나 있었는데, 사진의 내용과 사전답사내용을 합쳐 최치원의 생애를 알아보겠다.
<중 략>
6두품 계층의 사회적 한계와 직접 현실의 높은 벽을 경험했기에 최치원의 아버지는 12살의 아들에게 강박한 조치를 치한지도 모르겠다. 당시 신라는 골품제(骨品制)하에서 6두품세력은 많은 제약이 따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唐)에서 학문을 배우고 돌아오는 것이 사회의 중추 세력으로 성장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당에서 공부한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6년 만에 18세의 어린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하고 율수현위(溧水縣尉)라는 관직을 역임한다. 그 후에는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격황소서(檄黃巢書)」 헌강왕에게 올린 『桂苑筆耕集』제 11권의 첫머리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도(道)와 권(權)을 내세워 천하대세의 운행이치를 밝히고, 당나라 조정의 바르고 강성함과 황소 무리의 삐뚤어지고 무모함을 대비시켜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여 항복하도록 권유한 것.등의 명문(名文)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