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항 전후사 인물조사(박규수)
- 최초 등록일
- 2015.11.29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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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개화사상가로 연암 박지원의 손자 이다. 본관은 반남이고 호는 환재이다. 1807년 서울 계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어렸을 때는 주로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수학기에 박규수는 부친 朴宗采(1780~1835)와 外從祖 柳訸(1779~1821), 그리고 戚叔 李正履/李正觀 형제등을 통해 연암의 실학을 전수받을 수 있었으며, 湛軒 洪大容의 손자인 洪良厚와 결교하고 그와 함께 북학파의 燕行전통을 이어가고자 했다.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은 어머니·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심하여 20년간 칩거하면서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고 실학의 학풍에 눈을 뜬 뒤 윤종의(尹宗儀)·남병철(南秉哲) 등 당대의 학자와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실학적 학문경향을 한층 심화시켰다. 자와 호의 ‘환(桓)’이라는 글자를 ‘환(瓛)’자로 바꾼 동기도 세자의 죽음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은둔기에는 영/정조시대의 실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楓石 徐有榘(1764~1845)를 종유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연암의 심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연암의 선비론, 지원지동설, ‘법고창신’의 문학관과 독특한 문체 등은 수학기의 박규수의 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은둔기의 저작인 『거가잡복고』는 연암의 지론인 ‘의관 제도 개혁론’을 학문적으로 완성한 것이었다. 은둔기와 철종시대에 지은 한시에서도 연암의 문학관이나 연암 시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수학기부터 철종시대에 이르기까지 박규수의 사상과 문학에 지속적으로 연암의 영향이 나타나게 된 것은 , 그가 북학파의 후예임을 자각하고 조부의 실학을 계승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1840년대 말 1850년대 초에 박규수가 쓴 「闢衛新編 評語」와 「地勢儀銘」2)에서 그는 동양의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자신감 위에서 서양과의 교섭에 진취적으로 대처하고자 했다. 이러한 동도서기론의 발상은 고염무의 경세적 학풍, 梅文鼎(1633~1721)3)의 ‘서학중원설’과 魏源(1784~1856)4)의 『해국도지』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참고 자료
인터넷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
김명호, <<환재 박규수 연구>>, 파주, 창작과비평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