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과 이성계 : 라이벌 구도
- 최초 등록일
- 2016.01.10
- 최종 저작일
- 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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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 이성계, 최영의 선정이유
Ⅱ. 새롭게 등장한 중앙 세력
Ⅲ. 충신의 자리를 지킨 최영(1316 ~ 1388)
Ⅳ. 결론 : 지키느냐 새로 세우느냐.
참고자료
본문내용
고려 시대 말기, 이 시대는 이성계와 최영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말기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고려 왕조가 무너질 가능성을 내포하는 혼란함이 만연하던 시대이다. 사실 고려 말부터 조선 건국까지 다양한 크고 작은 사건들과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에 이 두 사람의 이름은 자주 등장한다. 우리는 단순히 이성계는 조선의 태조, 최영은 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로 유명한 충신으로 생각해왔다. 또, 그들은 혼란했던 고려 말, 나라 혹은 백성을 혼란 속에서 구하려고 했던 인물로 평해지고 나 또한 그렇게 보는 입장이다.
최영은 고려 왕조를 지키면서 이성계는 왕을 교체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면서 혼란 속에서 나라를 구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중 략>
이에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해 5월 22일 회군을 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개경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나 최영은 체포되어 고봉현으로 귀양을, 우왕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쫓겨나게 된다. 이렇게 권력을 잡은 이성계는 초기 조민수와 왕위 후계를 사이에 두고 대립했으나 이색의 조민수 지지로 1388년 창왕이 즉위한다. 당시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의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조민수를 제거하고, 김저 사건을 통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중 략>
둘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출발선, 고려를 지키는 무장으로 같은 길에서 시작했다. 그 둘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이 있다. 첫 번째로 최영은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이고, 두 번째로 이성계는 하극상이지만 혼란스러웠던 고려 말기를 개혁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들이 대립한 시기는 고려 말이었다. 대내적, 대외적으로 모두 혼란한 상황에서 그들은 여러 부분에서 갈라지게 된다. 첫 번째로는 신진사대부와 함께 교류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와는 교류가 적었던 최영이다.
참고 자료
김현묵, 「반역의 한국사」, 계백, 1994
박기현, 「손에 잡히는 고려 이야기」, 늘푸른소나무,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199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