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으로 보는 한국사
- 최초 등록일
- 2016.01.18
- 최종 저작일
- 20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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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신석기 시대
2. 청동기 시대
3. 고조선
4. 삼국시대
5.통일신라
6. 발해
7. 고려시대
8. 조선시대
본문내용
무덤 : 일정한 크기의 흙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고서 부장품(副葬品, 껴묻거리)을 함께 묻은 일종의 널무덤[土壙墓, 움무덤이라고도 한다]과 일부에서는 그 위에 돌로 덮어 돌무지를 만든 것도 발견되었다.
특징 : 시체 주위에 빙 둘러 돌을 놓아 보호하려 하였으며, 돌화살촉이나 토기를 부장(副葬, 껴묻기)하여 죽은 뒤의 생활에도 불편이 없도록 배려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자손들은 조상의 영혼에게 보호를 받는다고 믿은 것이다.
<중 략>
누상무덤 :노예소유자가 죽었을 때, 그 무덤에 노예도 같이 껴묻는 방식
누상(樓上)이라고 불리는 작은 언덕 위에 있는 이 무덤은 언덕의 정상부를 평평하게 고른 뒤 주위에 커다란 돌로 담을 쌓아 한 변에 20m 가량의 방형 구획을 정한 후 그 내부에 여러 개의 무덤구덩이를 만든 형태이다. 그 위에는 검은 흙과 자갈을 섞어서 전체를 덮었다.
개개의 묘광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묻혀 있어서 전체적으로 다인장(多人葬)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이를 노예소유자와 그를 위해 순장(殉葬)된 다수의 노예 들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 략>
신라나 가야에서 돌방무덤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후대에 등장한다. 신라는 중심지인 경주지역과 지방사회가 시기를 달리하여 확인되는데, 도읍지보다 지방사회에서 우선하여 등장한다는 특징도 있다. 돌방무덤인 황남동 151호분의 예로 보면, 신라 묘제로 돌무지덧널무덤과 돌방무덤의 교체가 6세기 초반경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보문리 부부총이나 통천리 와총 및 서박리 석침총 등의 사례에서 7세기 대에 이르러서야 돌방무덤으로 완전한 교체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돌방무덤도 모두 지하 혹은 반지하로 무덤구덩이를 파고 돌로 무덤방을 만드는데 모두가 단실로 되어 있다.
가야는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크게 발전하였는데 고령 고아동에서 조사된 돌방무덤을 통해서 적어도 6세기 중반경에는 중심지에서 돌방무덤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합천의 저포리와 두락리 유적 등지에 백제의 웅진시대 돌방무덤들과 대비될 수 있는 것도 확인된다.
참고 자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19679&cid=287&categoryId=287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19680&cid=287&categoryId=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