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 최초 등록일
- 2016.04.25
- 최종 저작일
- 2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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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김구, 생애에 따른 연보
1. 출생과 성장과정
2. 항일 구국운동
3. 애국계몽운동
4.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5. 광복군 운동
6. 해방 후의 정치활동
Ⅱ. 김구 - 임시정부를 이끈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1. 민족주의자 백범의 탄생
2.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Ⅲ. 김구가 남긴 그리고 우리 시대의 과제
Ⅳ. 「김구 청문회」- 김구에 대한 문제 제기
1. 김창수는 팔봉접주였나?
2. 안진사와의 밀약, 사실인가?
3. 쓰치다 사건의 진상
4. 김구는 왜 박은식 부자를 구타했나?
5. 김립 암살사건의 진상
6. 안두희는 김구 부하였다?
7. 「백범일지」는 누구의 작품인가?
8. 김구를 키운 것은 박정희였다?
본문내용
Ⅰ. 김구, 생애에 따른 연보
1. 출생과 성장과정
- 1876년(1세) 8월 29일 황해도 해주읍 백운방 텃골에서 출생
- 1878년(3세) 천연두를 앓음.
- 1880년(5세) 강령(康翎) 삼거리로 이사.
- 1882년(7세) 해주 본향 텃골로 다시 이사.
- 1884년(9세) 조부상(祖父喪)을 당함, 한글과 한문의 학습을 시작함.
- 1887년(12세) 집에 서당을 만들고 이생원을 초빙하여 한학을 공부함.
- 1890년(15세) 학골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 등을 배움.
- 1892년(17세)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 후 풍수와 관상 등을 공부하고 병서를 탐독함.
2. 항일 구국운동
- 1893년(18세)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의 종지(宗旨)를 듣고 동학에 입도하여 포교에 힘을 기울이고 이름을 창수(昌洙)로 고침.
- 1894년(19세) 접주(接主)로서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함. 동학군 토벌을 위해 일어난 진사 안태훈과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을 맺고 구월산으로 이전하였으나, 이동엽 부대의 습격을 받아 대패함.
- 1895년(20세) 안태훈의 집에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그의 훈도를 받음. 만주를 시찰하고 김이언의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강계성(江界城)을 습격했으나 실패함.
- 1896년(21세) 2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함.3개월 후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2개월 후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이감됨. 감옥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읽고 신학문에 눈뜸.
- 1897년(22세) 7월에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황제의 특명으로 사형 직전에 특사령이 내려짐. 그러나 일본 공사 하야시의 압력으로 출감하지 못함.
- 1898년(23세) 3월 9일 탈옥.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됨, 법명 圓宗.
- 1899년(24세) 평양 대보산 영천암(靈泉庵)의 방주(房主)가 되어 지내다가 환속하여 귀향함.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