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위기관리(북한의 1차, 2차 핵 위기 사례를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6.05.24
- 최종 저작일
- 20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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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의 1차 2차 핵실험으로 인한 사례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위기관리와 대응방향을 연구하였다.
목차
Ⅰ. 1차 핵 위기
1. 1차 핵 위기의 배경
2. 1차 핵 위기의 내용 및 경과
3. 1차 핵 위기의 위기관리
Ⅱ. 2차 핵 위기
1. 2차 핵 위기의 배경
2. 2차 핵 위기의 내용 및 경과
3. 2차 핵 위기의 위기관리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하자 한국과 미국은 모두 강경하게 반응하였다. 우리나라 측은 1993년 5월 20일 황인성 국무총리 명의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고위급회담 대표접촉을 갖자고 북한에 제의하였다. 1993년 6월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핵무기를 갖고 있는 상대와는 결코 악수할 수 없다” 며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핵 문제 양보 없이는 남북문제의 해결 불가 원칙을 강조하였다.미국에서도 의회와 강경파를 중심으로 군사적 행동 등 강압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 반응이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북한이 NPT를 최종 탈퇴하기까지는 탈퇴 선언 이후 90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한·미 양국은 북한을 설득하여 NPT 탈퇴 선언을 철회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남·북한 사이에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우리 측의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접촉 제의를 북한이 최고위급 특사교환으로 수정 제의해 온 것을 우리 측이 받아들인 데에 따른 것이었다. 특사 교환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은 1993년 10월에 시작되어 핵위기가 절정에 다다른 1994년 봄까지 계속되었으나 접점을 찾지 못했다.그사이 북한은 미국과도 접촉을 가졌다. 클린턴 정부는 1993년 6월 미·북 고위급회담을 열어 핵문제 해결과 관계 정상화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은 미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 로버트 갈루치(Robert Gallucci)와 북한 외교부(현재의 외무성) 제 1부부장 강석주를 대표로 뉴욕에서 열렸다. 6월 11일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의 불사용 및 불 위협 보장’, ‘전면적인 핵안전조치의 공정한 적용’을 포함한 ‘비핵화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 보장’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등 진전을 보였으며 이로써 북한은 NPT 탈퇴 선언을 일단 철회하였다.또한 같은 해 7월 제네바에서 열린 2단계 미·북 고위급회담에서는 북한 핵문제 해결의 일환으로,
참고 자료
윤원규, "북한 핵위기와 북미협상", 2012., 학위논문(박사)--, 경남대학교 대학원
이웅수, "미국의 대북한 강압외교 연구 : 제1·2차 북·미 핵 위기를 중심으로", 2008., 학위논문(석사)--, 북한대학원대학교
조남진, "북한 핵 위기관리 연구", 2004., 학위논문(박사)--, 동국대학교 대학원
홍정안, "북한 핵문제에 대한 미국의 해결전략 및 한국의 대응방향", 2005., 학위논문(석사)--, 경남대학교 행정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