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탑평리 7층석탑(중앙탑) 답사 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6.06.28
- 최종 저작일
- 20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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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얼마 전 할머니의 94번째 생신을 맞아서 온 가족이 나의 사촌누나가 살고 있는 충주로 모이게 되었다. 광주가 고향이고 서울이 거주지인 나로서는 충청도 땅은 전라도와 경기도 사이에 있어 굉장히 가까운 곳이지만 언제나 고속도로 위에서 그저 스쳐지나가는 땅이었고 그다지 큰 인연이 닿진 못했다. 충청도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생 시절의 짤막했던 수학여행이었던 것 이외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었다. 좀처럼 왕래할 일이 없던 충주였는데 사촌누나의 초대와 할머니의 94번째 생신이라는 은복이 맞물려 오래간만에 충주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지리적으로 충청도는 한반도의 가운데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여러 나라가 거쳤고 통치됐던 지역이다. 그 중에서 충주지방은 동쪽은 제천시, 서쪽은 음성군, 남쪽은 괴산군, 경상북도 문경시, 북쪽은 경기도 여주시과 강원도 원주시와 접하고 있다. 경상좌도에서는 죽령을 지나 충청도의 충주로 통하고, 경상우도에서는 조령을 지나 충주를 거쳐 갔다. 두 고개 모두 충주에 모여서 물길이나 육로로 한양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충주는 한반도의 한복판이고,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런 연유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서로 점령하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 충주, 중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충주는 고대의 각 국가에게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격전을 펼쳤다. 본래 수 세기동안 백제 땅이었으나 장수왕의 남하정책 당시 고구려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곳 중원을 고구려 때는 국원성이라 부른다. 6세기 이후에는 신라가 이곳을 빼앗은 다음 진흥왕 때는 소경(小京)을 설치하였고 귀족들과 6부 호민을 옮겨 살게 한 다음 경덕왕 때 이 지역을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쳐 불렀다. 각 국가가 충주를 차지했던 시기가 각 국가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를 놓고 어떤 이들은 "충주를 차지한 나라는 전성기를 누렸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발언은 “한강을 차지한 나라는 전성기를 누렸다”라는 발언과 같은 맥락인데 그만큼 충주가 지리적으로 핵심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의미한다.
참고 자료
[학술논문]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실측조사(장현석)
위키백과 – 탑평리 칠층석탑
네이버 백과사전 – 탑평리 칠층석탑
동양일보 기사 – 충주시 국보6호 탑평리 칠층석탑 안전진단
다음 블로그 토함산솔이파리 – 탑의 세부 명칭도
이글루 산아산아 블로그 – 탑의 각 부위 명칭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8:남한강편: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 (유홍준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