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와 조운
- 최초 등록일
- 2003.07.03
- 최종 저작일
- 2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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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조선시대 교통과 통신수단
본론: 조운과 봉수
결론: 마산지역의 조운과 봉수
본문내용
서론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그렇듯 교통과 통신은 언제나 각 지역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이 매개체로 현대사회에서는 육지에서의 발달된 도로와 드넓은 상공, 그리고 해상에서의 해로가 있고 집에 앉아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정보의 바다에 빠질 수 있는 컴퓨터가 그것이다. 이러한 교통과 통신에 있어서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을까? 조선시대에 교통과 통신수단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지닌 것은 봉수와 조운제도 였다.
본론
봉수대란 원래 옛날 군사통신 기지로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그때마다 일어난 사태를 교신하던 시설이다. 우리나라에서 봉수제도가 실시된 것은 고려 의종 3년(1149) 8월 당시 서북면병마사였던 조진약(曺晉若)의 건의에 의해 채택되었다. 교신방법은 오래 지속되는 산짐승의 배설물을 이용하였고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평상시에는 l번씩 올리고, 2급(二急)에는 2번, 3급에는 3번, 4급에는 4번씩 올리도록 하고, 각 봉수소(대)에는 방정(防丁) 2명, 백정(白丁) 30명을 배치하며, 그들에게 평전(平田) l결(結)씩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이것이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크게 정비되고 발전된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세종은 집정 초기부터 봉수의 거수와 봉화군의 정원 등 여러 규정을 정비하고 총 5개의 노선을 설치하여, 목멱산(서울남산)을 중심으로 한 5개의 노선 중 북쪽에는 경흥, 관개, 의주에 두었고 남쪽으로는 부산동래, 전라도 순천이 있었다.
조선의 봉수는 그 시설 상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인 서울 목멱산(木覓山:南山)의 경봉수(京烽燧), 연해봉수라고도 하며 바닷가에 위치하거나 북쪽 가까이에 있는 봉수이므로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인 연변봉수(沿邊烽燧),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의 셋으로 구분되었데, 이 중 연변봉수는일종의 작은 성루와 같은 시설을 가진고 있어, 봉수대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세우며 군사무기를 갖추었다. 이처럼 봉수대 중 가장 중요한 곳으로 임무 수행이 가장 고되었다. 그리고 내지봉수는 중간봉수로서 수적(數的)으로 절대다수였다. 이 3종류의 봉수는 시설 ·정원 ·처벌규정에 있어 차이가 있었다. 이 밖에 직봉(直烽) ·간봉(間烽)으로 구분되는데, 직봉은 기간(基幹) 선로상의 것이고 간봉은 그 보조선이며, 이는 다시 직봉 사이의 중간지역을 연결하는 장거리의 것과 제일선의 연대로부터 본진(本鎭) ·본읍(本邑)에 보고하는 단거리의 것으로 구분되었다.
봉수대에서는 거수를 달리하여 평상시에는 1거(炬), 왜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2거, 왜적이 해안에 가까이 오거나 적이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거, 우리 병선과 접전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왜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에 침범한 적과 접전하면 5거씩 올리도록 하였다.
참고 자료
°「마산의 문화유산」/ 마산시 1997
°「경남 고성의 문화유적」/ 고성군 1997
°「경남 문화재 안내판 문안집 (도지정 문화재)」/ 경상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