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계원필경
- 최초 등록일
- 2016.08.11
- 최종 저작일
- 20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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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최치원의 생애
2. 계원필경의 주요내용
3. 작품 해설 및 비평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최치원의 생애
고운 최치원은 857년(문성왕 19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신분은 6두품으로 유교의 엄격한 가풍으로 유명한 최씨 가문이지만 가계도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 견일(肩逸)이 원성왕의 원사찰이었던 승복사의 창건에 관계하였다는 것 정도만 기록되어 있다.
최치원은 868년(경문왕 8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 유학을 떠났다. 바다를 건너 머나 먼 이국으로 가는 어린 아들에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당나라에 가서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자식이 아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간지 7년 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한다. 그리고 2년 동안 당나라 도읍인 낙양을 유랑하면서 시문에 몰두한다. 이때 그는 《금체시》5수 1권, 《오언칠언금시체》100수 1권, 《잡시부》30수 1권 등을 지었다.
876년(헌강왕 2년) 최치원은 당나라의 선주 표수현위가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오른다. 878년 겨울에 표수현위 직을 사임하고 양양지방의 실력자 이위의 문객으로 머물다가 회남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 된다. 야망을 품은 청년 최치원에게는 별로 신통치 않은 벼슬길이었다. 그러한 최치원이 중국대륙에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879년에 일어난 황소의 난이었다.
황소의 난은 당나라 말 희종 때 일어난 대규모 농민반란이다. 당나라 말기에는 중앙관리의 당쟁과 환관들의 권력개입으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졌다. 이런 불안한 사회적 배경 하에 산동지방에서 소금 장사를 하던 왕선지, 황소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왕선지가 죽자 황소는 그 잔당들을 모아 대규모 반군을 조직하여 산동성뿐만 아니라 하남, 강서, 복건 등을 휩쓸고 880년에는 당나라의 도읍이었던 낙양과 장안까지 함락시켰다. 황소의 반란군에 의해 도읍이 함락되자 당희종은 사천성으로 피난가고 황소는 장안에다가 스스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대제, 연호를 금통이라 칭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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