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공화국 자유부인 부패
- 최초 등록일
- 2016.09.29
- 최종 저작일
- 2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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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대사 이승만 제 1공화국 관련 역사 레포트입니다. 주로 부패를 다룬 내용입니다.
목차
Ⅰ. 정치, 경제
1. 국민방위군 사건
2. 부산정치파동
3. 중석불 사건
4. 사사오입개헌
5. 보안법파동
Ⅱ. 사회, 문화
1. 자유부인 논쟁
2. 박인수 사건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정치, 경제
1. 국민방위군 사건
국민방위군은 미국정부가 새로운 부대른 창설하는 것 보다 기존부대를 보충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강조하고 이에 한국 정부는 중공군과 맞서 싸우려면 많은 병력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여 독자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설치하였다. 국민방위군은 1950년 12월 21일 공포되었고 순식간에 50만명을 넘어섰다.
전쟁 중에 이승만정부의 행태는 국난을 극복하고 국민을 보호하여 자주 독립국을 세우려는 자세가 아니었다. 1951년 1월 국민방위군사건이 벌어졌다.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하여 제2국민병에게 해당하는 만 17~40세의 장정들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켰다. 국군의 후퇴가 시작되어 방위군을 후방으로 집단 이송하게 되자 방위군 간부들은 이 기회를 틈타 막대한 돈과 물자를 빼돌려 사복을 채웠다. 육군본부의 기록에 따르면 그 결과 보급부족으로 1951년 2월 말까지 남하하다가 아사, 행방불명, 동상, 질병 등으로 낙오된 장정이 27만 3000명이나 되었다. 이들이 부정처분한 돈과 물자는 당시 화폐로 무려 24억 원, 양곡 5만 2000섬에 달했다.
국회는 진상조사에 나서는 한편, 4월20일 방위군 해산을 결의함에 따라 5월 12일 방위군은 해산되고, 사건을 일으킨 김윤환, 방창언, 박기환 등 4명은 사형이 선고되었다. 국민의 불신이 얼마나 컸던지 이들을 빼돌릴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대구 외곽의 화원이란 곳에서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처형해야 할 정도였다. 이승만은 이 사건이 문제가되자 국방장관 신성모를 해임하고 이기붕을 임명하면서 수습에 나섰으나 이승만과 정부의 행태, 군부의 부패문제는 쉽게 시정되지 않았다.
2. 부산정치파동
이승만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이유는 간단했다. 대통령재선이 위태로웠기 때문 이었다. 제헌헙법에서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이승만을 차기 대통령으로 밀어줄 세력이 별로 없었다.
참고 자료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역사비평사, 2007)
임영태, 『오늘의 우리를 만든 역사읽기 두 개의 한국 현대사』(㈜도서출판 아름다운 사람들, 2014)
최경숙, 『한국현대사의 이해』(부산외국어 대학교, 2001)
김상응, 『‘독부’이승만 평전』(㈜책으로보는 세상, 2012)
최은영, 「자유부인 연구 : 대중문화 반영을 양상을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