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과정, 신라의 삼국통일을 바라보는 세가지 시각(삼국통일론, 남북국론, 절충론), 삼국시대의 종말에 관한 북한, 중국, 일본의 인식
- 최초 등록일
- 2016.10.31
- 최종 저작일
- 20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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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
Ⅲ. 신라의 삼국통일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
Ⅳ. 삼국시대의 종말에 관한 북한, 중국, 일본의 인식
Ⅴ. 나가며
Ⅵ. 토론
Ⅶ.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국사에서 7세기 후반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기의 하나이다. 신라와 당의 연합에 의한 660년의 백제 멸망과 668년의 고구려 멸망, 676년 당 세력의 축출과 698년 고구려 고지에서 발해의 건국 등 일련의 연대기적 사실이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후대의 역사인식은 ‘신라의 삼국통일’ 또는 ‘신라의 반도통일과 발해의 건국’등으로 정리되고 있다. 이번 발표에서는 바로 이러한 인식에 대한 재검토의 기회를 갖고자 한다.
<중 략>
청주시운천동사적비에 나오는 삼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의미하는 것이며 수도 경주에 거주하는 골품귀족은 물론 소경인 서원경 사람들도 일통삼한의식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식은 당지 지배계층인 골품귀족에게는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신라 말기까지 지속되었으며, 골품제도에 회의적이었던 최치원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에서 삼국의 삼국통일을 찬양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인식이 그대로 이어져 삼국사기에 신라의 통일에 대한 최초의 긍정적 평가가 이루어졌으며, 일연에게도 계승되어 삼국유사에 ’왕은 유신과 더불어 마음과 힘을 함께 삼한을 통일하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니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민족통일의 의의보다 명분론적인 죄를 묻는 시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일부의 부정적인 신라통일론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견해는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져 이후, 현재《동국사략》(1905), Hulbert 《Passing of Korea》(1906)에서 긍정적인 신라의 통일론이 나타났다. 삼국통일을 긍정하는 입장은 대개 초기의 근대사가들에게 연결되었으나 사회경제사학자들은 통일을 인정치 않고 있으며, 비교적 남창 손진태가 긍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그는 신라의 통일은 ’민족의 결정‘으로 간주하였으나, 그것이 반분(만주상실)이라는 민족사의 불행이라고 인식하였다. 또한 이인영은 삼국통일은 신라의 통일의지와 중국의 동진정책의 결합으로 풀이하였고, 장도빈은 통일을 통해 청천강 ~ 덕원으로 국경선을 확대하고 문화의 극성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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