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인물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6.11.25
- 최종 저작일
- 20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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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숙주’ 인물에 대하여
A+ 학점을 받은 소중한 레포트자료입니다. 좋은 Sample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차
1. 신숙주라는 인물은 어떠한 인물인가?
2. 신숙주는 왜 같은 동료의 저항을 보면서도 세조의 정권에 협력했는가?
3. 신숙주의 모습을 통해 본 역사 속에서 지식인들의 삶
본문내용
1) 신숙주
세종~세조 연간의 정치적 변동 속에서 한편으로 명분을 잃었다는 비판 속에서 성삼문, 박팽년 등 죽음을 각오한 저항 속에서 같은 동료 지식인들의 저항을 보면서도 세조의 정권에 협력하여 조선의 제도, 문화 사업에 기여하였지만 세조 말년에서 성종 초년까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훈구공신으로 젊은 사류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던 이러한 인물들의 모습 속에서 역사의 방향과 개인적인 욕망 속에서 지식인들의 삶은 역사속에서 어떻게 실현되는 것인가?
1. 신숙주라는 인물은 어떠한 인물인가?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경력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이다. 신숙주는 젊은 시절부터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21세 때인 1438년(세종 20) 생원ㆍ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문과에서 3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하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세종대가 끝날 때까지 그는 집현전 부수찬(종6품), 응교(정4품), 직제학(정3품)과 사헌부 장령(정4품), 집의(종3품) 등의 주요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 시기의 경력에서 중요한 장면은 우선 26세 때인 1443년(세종 25)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 사행에 동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장관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보좌하면서 사행을 기록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을 맡은 중요한 직책으로, 당시의 가장 뛰어난 젊은 문관(4~6품)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고 전해진다. 상당한 정도의 신병을 무릅쓰고 출발했지만, 신숙주는 일본 본토와 대마도를 거치면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여러 외교 사안을 조율했다. 특히 대마도주를 설득해 세견선(歲遣船)의 숫자를 확정한 것은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또한 1450년(세종 32) 중국에서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이 사신으로 왔을 때 그들을 접대하면서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발휘한 것도 매우 잘 알려져 있는데, 예겸은 자신이 지은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에 신숙주가 걸어가면서 운을 맞춰 화답하자 “굴원(屈原)과 송옥 (宋玉) 같다”면서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참고 자료
박덕규, 『신숙주 평전 - 사람의 길, 큰사람의 길』, 1995, 둥지
국립국어원, 『신숙주의 학문과 인간』, 2002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세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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