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국공합작과 항일전쟁
- 최초 등록일
- 2016.11.27
- 최종 저작일
- 20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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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공산당의 대장정
Ⅲ. 일제의 침략과 제 2차 국공합작의 성립
1) 만주사변
2) 서안사변
Ⅳ. 제 2차 국공합작과 분열, 그리고 항일전쟁
Ⅴ. 결론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제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된 후 장제스는 국민당 내부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북벌을 진행했고 결국 완전히 장악하였고 남경 국민정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자본가들을 지지를 얻고 있던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쿠테타를 일으켜 대학살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공산당은 1만여 명만이 살아남게 되었고 이들은 국민당 반란군을 조직하였고 국공내전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공산당의 대장정이 시작되었고 만주사변, 서안사변 등이 일어나 결국 제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게 되었다. 또한 중국을 삼키려는 일본의 야욕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항일전쟁도 진행되었다.
여기서는 제 2차 국공합작 성립·결렬의 전반적인 상황과 항일전쟁의 전개를 알아보고자 한다.
Ⅱ. 공산당의 대장정
1927년 7월 15일에 무한 정부에서 떨어져 나온 중국 공산당은 7월 25일에 중공 중앙 확대 회의를 소집하고 南昌에서 기의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무장으로 국민당에 항거하며 독립적인 농촌 토지혁명을 이끌어 나간다는 방침 아래 공산당 휘하의 군대를 동원해 1927년 8월 1일 남창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폭동은 국민당이 파견한 군대의 포위로 사흘 만에 南昌에서 물러났다. 실패 후 중공 중앙은 8월 7일 漢口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8·7회의) 당시 초대 서기장이었던 진독수와 그의 지도하에 있던 당 중앙의 노선을 우경기회주의라고 규탄하고 국민당에 대한 무장 항거와 토지혁명을 수행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당은 구추백이 이끌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토지개혁 및 무장투쟁(국민당 토벌), 농민폭동(추수기간 폭동)을 결의할 것을 목표로 삼고 본거지를 무한에서 상해로 거점을 이동하였다. 8·7회의 이후 구추백이 공산당을 장악하였는데 구추백은 좌경맹동주의 사상이었다. 구추백은 화남지역에서 농민폭동(추수폭동)을 지시했고 노동자와 농민을 통합하는 군사세력을 형성한 후 폭동을 일으켰다. 또 철도 폭동 등을 실시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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