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삼국시대 중심) 금석문 탐구 리포트 [역사학개론, 한국고대사, 역사, 국사]
- 최초 등록일
- 2016.12.02
- 최종 저작일
- 20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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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고대 삼국의 금석문
Ⅱ-1. 울진 봉평신라비
Ⅱ-2. 광개토 대왕릉비와 신묘년조
Ⅱ-3. 칠지도의 명문과 고대 한일관계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고대의 문자는 일반적으로 종이에 쓰거나 인쇄되어 그 내용이 후세에 전해진다. 그러나 종이 이외의 소재를 통해 쓰여 진 고문자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문자들은 구리, 철 등의 금속에 새긴 것을 금문, 돌에 기록한 것을 석문이라고 하며, 이를 합쳐서 금석문이라고 명명한다. 고대 한반도의 금석문 유적·유물은 삼국시대 각 국가별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신라의 금석문 기록은 크게 개인적 차원, 국가적 차원, 공적인 입장에서의 기록 3가지의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본문에서 주로 다루어 볼 울진 봉평비의 경우는 비의 성격이 명확하지 않으나 제의(祭儀)와 관련된 것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기록된 경우에 속한다. 고구려는 수많은 전적과 금석문 자료를 남겼다. 중원고구려비, 호우명문 등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광개토 대왕릉비는 지난 1세기 동안의 연구 성과로써 그 내용을 상당부분 규명하였고, 고대 한일 양국의 관계사 연구에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백제의 경우 한성시대의 금석문 자료인 칠지도 명문이 유명하다. 그러나 그 제작 시기와 내용 등은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위와 같이 고대에는 많은 종류의 금석문들이 존재한다. 본문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대표적인 금석문과 그에 얽힌 논란과 사실들을 서술하고자 한다.
Ⅱ. 고대 삼국의 금석문
Ⅱ-1. 울진 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삼국의 역사사료를 생각하자면 우리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이 두권은 모두 삼국시대가 끝난 후에 편찬된 기록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대사를 온전하게 밝히는데 부족한 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원 고구려비, 진흥왕 순수비와 같은 당대의 사건을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주는 역사기록은 더없이 소중하다. 그 중에서도 울진에서 발견된 신라의 봉평비는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의 비석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풍부한 내용을 자랑한다. 봉평비에 새겨져 있는 글자는 총 398자 이며 높이는 2m4cm에 이른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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