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석탑
- 최초 등록일
- 2016.12.16
- 최종 저작일
-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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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2-1 고선사지 삼층석탑
2-2 구황리 삼층석탑
2-3 천군동 동·서 삼층석탑
3. 결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서론
신라는 삼국통일 후 20여 년간 계속된 당나라와의 전쟁이 끝난 676년경부터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남북국 시대의 탑은 이 같은 문화적 기반 아래에서 건립된 사천왕사 목탑과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 기본형식을 갖추게 된다. 남북국 시대의 탑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이전 시대와 구별된다. 첫째, 주로 석탑이 건립되었으나 목탑과 전탑, 금동탑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탑도 건립되었다. 둘째, 이중기단에 삼층 탑신을 갖춘 삼층석탑이 유행하였다. 셋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이라는 조탑경의 등장과 유행으로 많은 탑이 건립되고 수리되었으며, 경주지역에서만 이루어지던 탑 건축이 9세기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백제에서 처음 만들어진 한국의 석탑은, 남북국 시대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이라는 전형 양식을 탄생시켰다. 이 석탑은 남북국 시대와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까지 세워진 모든 삼층석탑의 시원이 되는 중요한 탑이다. 석탑이 백제에서 처음 만들어지기는 하였지만, 백제의 석탑은 목조 건축을 만들 듯 수많은 석재를 결합하여 완성하는 결구식 석탑이었다. 하지만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부터 거대한 판석을 다듬어 조합하는 판석식 석탑,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의 석탑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중 략>
2. 본론
① 고선사지 삼층석탑
탑이 있던 고선사에 대해서는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아 무열왕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1021년 5월에 “상서좌승 이가도에 명하여 이 절에 있던 금란가사와 불정골, 창림사에 있던 불아를 가져오게 하여 내전에 안치하였다.”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사찰의 규모를 갖추고 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폐사에 관해서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1913년 일본학자들에 의해 원효대사의 행적비인 서당화상비편이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기록된 바대로 원효가 주석했던 사찰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사지는 덕동다목적댐 공사로 인해 수몰 예정 지역으로 편입되어 1975년 문화재관리국 산하 경주사적관리사무소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고, 석탑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웠다.
참고 자료
「경상북도의 석탑I,II」 (석조건축 연구자료 제5호, 제6호), 국립 문화재연구소
「한국의 석탑」 박경식, 학연문화사
「한국의 석조문화」 박정근, 김종대, 다른세상
「한국의 탑」 김환대, 김성태, 한국학술정보
「한국미술사」 진홍섭, 강경숙, 변영섭, 이완우, 문예출판사
「클릭, 한국미술사」 강민기, 이숙희, 장기훈, 신용철, 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