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오규원 정현종 최승호 이기철 서정주 분석
- 최초 등록일
- 2016.12.22
- 최종 저작일
- 20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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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천상병
2. 서정주
3. 오규원
4. 정현종
5. 최승호
6. 이기철
본문내용
<천상병>
천상병은 1930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를 산출하자는 상과대학의 이념과 최소의 노력으로 최소만을 기대하자는 시인의 나라의 이념은 서로 대비가 되어 아이러니하다. 그는 자신의 대학 출신답게 그와 맞는 직종에서 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엔 시를 썼다. 1952년 <문예>지를 통하여 시인으로 등단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시를 썼다고 하니, 약 40여년간 시를 써온 셈이다. 그는 이 사이에 <새>, <주막에서>,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귀천>등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이중 시집 <새>는 천상병이 죽은 줄 알고 그의 시를 모아 친구들이 내준 천상병의 첫 시집이었다. 천상병은 기인답게, 버젓이 살아있으면서 유고시집을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었던 것이다. 이 시집에서 천상병은 그의 시 세계의 중심 심상이라 할 수 있는 새를 통하여 삶과 죽음, 천상과 지상의 교차점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정적 스타일에서 벗어나 리얼리즘 스타일의 시로, 감춰온 현실비판 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들을 거쳐 그는, 김관식, 고은과 함께 1950년대 한국 시단의 3대 기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천상병시인은 1960년대의 이른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후유증으로 인해, 기인에서 폐인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아니 승격하게 되었다. 그의 시 ‘그날은 새’에서 잘 드러나 있듯,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도 갔다 오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는 등 천상병에게 동백림 사건으로 인한 고통은 너무나도 컸다. 그를 알면서도 승격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천상병 시인은 아름다운 폐인이었기 때문이다. 폐인이 된 천상병은 직업이 없었다. 그저 시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삶에도 만족하며 살 수 있었다. 하루에 막걸리 한 병과 담배 한 갑만을 살 수 있는 돈을 얻어 쓰며 살아온 그는, 사회인보다는 자연인에 가깝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