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남한산성의 기원과 축성
2) 주요 시설
3) 병자호란과 당시 남한산성
3)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 대한 인식
5) 남한산성에서의 항일투쟁과 일제의 침탈
본문내용
1) 남한산성의 기원과 축성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시기 남한산(南漢山)에 지어진 성을 주장성(晝長城) 또는 일장성(日長城)이라 하여, 남한산의 동쪽 봉우리 위에 축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대외적 방어의 요새지로 활용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 뒤 고려에 와서는 수도가 송악(松岳)이었기에 그리 중요치 않게 여겨졌다. 고려 太祖 이후의 축성 관계 기록 중에도 이곳에 산성을 수축했거나 중수한 일은 거의 보이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후 조선 초에도 축성에 관한 언급이 없었는데, 이는 명나라와의 적극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하여 북방민족에 대한 위협감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급진적으로 변화되어 한양의 종묘(宗廟)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도 수도로부터 멀지 않은 남한산에 축성을 하는 것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전란이 일어난 이듬해 10월 柳成龍이 남한산성 등을 지키면 호남을 방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중 략>
2) 주요 시설
남한산성 내에는 행궁(行宮)·누정(樓亭)·창오(倉敖)·성곽(城廓)·장대(將臺) 등의 시설이 설치되었다. 행궁은 본래 왕이 여러 곳을 행차할 때 임시로 유숙하는 곳인데, 남한산성의 경우, 앞서 언급하였듯이 유사시 駐蹕로 활용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행궁의 건립은 축성이 시작된 지 2개월 뒤인 9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4월 완공하였는데, 이 역시 이서의 계획이었다. 행궁의 크기는 총 227間 半에 이르며, 그 뒤 숙종 37년(1711) 좌전(左殿)과 우전(右殿) 30間을 추가로 지었다.
행궁 주변에는 부속건물이 설치되었는데 종묘 봉안처로서 좌전과 사직 봉안처로서 우전을 비롯하여, 좌덕당(左德堂, 숙종 14년 건립), 한남루(漢南樓, 정조 22년 건립), 인화관(人和舘, 인조 2년 건립)이 있고, 관청으로 좌승당(坐勝堂, 순조 17년 건립), 일장각(日長閣, 순조 29년 건립), 수어영(守禦營, 인조 축성시에는 鍊武堂 일을 하던 것을 정조 3년에 개칭함) 등 많은 관청 건물들이 성내에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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