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문 분석
- 최초 등록일
- 2017.03.05
- 최종 저작일
- 20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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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논문을 중심으로 광개토대왕비문을 분석하였습니다. (비문의 독음 달려있습니다)
목차
1. 비문 본문 및 독음
2. 분석
3. 참고문헌
본문내용
2. 해설
「광개토왕 비문」은 크게 3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부 건국 신화와 왕실의 계보, 2부 광개토왕의 업적, 3부 수묘인(守墓人) 규정으로, 이 중에서 둘째 단락에 광개토왕 대의 영역 확장 내용이 자세하다.
1부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왕계가 적힌 부분으로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 유류왕, 대주류왕 3대의 왕위계승과 광개토왕의 행장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2부에는 광개토왕이 즉위 후 수행했던 정복 활동의 내용과 그 성과를 연대 순서대로 기록 했다. 이 사료에서 광개토왕대의 대외 전쟁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한 궁솔형(躬率形)과 왕이 장수를 파견해 전쟁을 한 교견형(敎遣形)이 그것이다. 그 중 궁솔형의 비중이 적지 않은데, 이 점은 고대 국가의 특징으로 국왕의 군사적 능력이 왕권의 중요한 요소였음을 보여 준다. 또한 「광개토왕 비문」에 기록된 전쟁의 이유는 마땅히 고구려에 속민(屬民)이어야 할 주변 여러 나라가 이러한 도리를 어겼거나 왜(倭)와 같은 외부 세력이 이를 침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 질서를 상정하고, 이러한 질서 속에서 전쟁의 명분을 찾은 것이다.
이 사료에 보이는 5세기 전후 고구려의 국제 관계는 고구려-신라와 백제-왜의 대립 구도로 이해할 수 있다. 4세기 전반 고구려와 백제는 각각 낙랑•대방 지역의 북•남방 지역을 차지하며 국경을 마주하였으며, 이후 양국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고구려 고국원왕 39년, 백제 근초고왕 24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고구려가 백제 방면으로 남진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이 오히려 반격을 가해 고구려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심지어 371년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은 백제의 공격으로 평양성에서 전사하기까지 하였다.
참고 자료
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연민수, 서영수 외 - 「광개토왕비의 재조명」, 동북아 역사재단
조인성 - 「廣開土王陵碑를통해본高句麗의守墓制」
이성제 - 「集安_高句麗碑〉로본守墓制」
손영종 -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이성시 - 「廣開土王碑の立碑目的に關する試論」
노태돈 - 「고구려사 연구」
조법종 외 - 「이야기 한국고대사」, 청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