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과 김홍집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7.06.02
- 최종 저작일
- 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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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발표 내용
2. 예상 질문과 답변
3.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발표 내용
갑오개혁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제 1차 갑오개혁은 1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후, 이를 제압하기 위해 민씨정권의 요청을 받고 온 청군과 텐진 조약으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이 들어오게 되었다. 일본군은 철군하지 않고 단독으로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안을 강요하였다. 정부는 이에 맞서 독자적인 개혁을 위하여 교정청을 설치하고 개혁에 착수하였지만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민씨정권을 몰아낸 후,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김홍집을 수반하는 내각을 수립하였다. 새 정권은 군국기무처를 설립하고 군국기무처의 주도 하에 개혁이 진행하였다. 청일전쟁의 승패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제 1차 개혁은 상대적으로 일본의 간섭이 약했던 상태에서 자주적으로 추진되었다. 제 2차 갑오개혁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일본이 개혁에 적극 개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 세력을 내쫓음과 동시에 군국기무처를 폐지하였다. 망명 중이던 박영효와 서광범 등이 귀국하자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이 구성되었다. 고종은 종묘에 나가 홍범14조를 포함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책 백서이자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지닌 ‘독립서고문’을 선포하였고 2차 개혁은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에 의해 추진되었다. 삼국간섭이 일어나자 고종과 명성 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간섭을 막으려고 하였다. 친일 관료들이 권력에서 밀려나고 이완용, 이윤용 등 친미․친러적인 관료들이 등장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김홍집을 필두로 친일적인 내각을 구성하고 을미개혁(제 3차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단발령의 시행은 을미사변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고 의병 진압의 틈을 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였다. 김홍집, 어윤중 등 개혁 주도 세력이 처단되고, 일부 친일 관료가 망명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참고 자료
안승일,『김홍집과 그 시대』, 연암서가, 2016.
유영익, 「김홍집」, 『韓國史市民講座』, 일각사, 2002, pp.103~133.
왕현종, 「한국 근대 국가의 형성과 갑오개혁」, 역사비평사, 2003, pp.130~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