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숙제 - k팝으로 알아보는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교류
- 최초 등록일
- 2017.10.25
- 최종 저작일
- 2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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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한국과 프랑스 문화교류의 시작
2. k팝으로 알아보는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교류
3. 한불 문화교류 통해 양국 상호 이해 증진에 이바지
1)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 수훈
2) 프랑스 사회에 한국적인 가치 소개하는 선봉장
4.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문화교류 재고방안
5. 참고문헌&사이트
본문내용
1. 한국과 프랑스 문화교류의 시작
서유럽 국가 중 한국과 가장 먼저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나라는 사실상 프랑스이다. 1835년(헌종 1)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 P.모방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한국 땅을 밟은 이래 1836년에는 조선 주교(主敎)로 임명된 앵베르(한국명 范世亨)와 신부(神父) 샤스탱이 잠입,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탄생시키는 등 포교활동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1839년 주교 앵베르, 신부 샤스탱, 모방 등이 사학(邪學)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참수된 데 이어 1866년(고종 3) 천주교 탄압 때는 주교 베르뇌를 비롯한 7명의 신부가 참형당하는 비극을 낳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독 로즈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한강 하구까지 침입,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으며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흥선대원군이 몰락한 뒤 서유럽 제국에 문호를 개방한 것을 계기로 1886년에는 프랑스의 코고댕과 한성판윤(漢城判尹) 김만식(金晩植) 사이에 한불수호조약(韓佛修好條約)과 통상장정(通商章程)·선후속약(善後續約) 등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국운 쇠퇴와 일제의 강점으로 공식관계는 끊어진 채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 채널로서 이용되는 데 그쳤다.
한국과 프랑스의 본격적인 우호관계는 8·15광복 이후 1949년 2월 정식국교가 수립되고 양국의 상주공관이 설치되고 난 뒤부터 시작된다. 6·25전쟁 때에는 UN군의 일원으로서 전투병력을 파견한 혈맹이었으며, 외교적으로는 우방국으로서 경제·과학기술·문화협력 등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수교 이후 관세협정(1963)·민간항공협정(1974.6) 등이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1984년 12월 1일자로 파리 주재 북한통상대표부를 총대표부로 승격시켜, 북한은 외교적 지위만 갖지 않을 뿐 기능면에서는 실질적으로 일반 대사관에 준하는 대표부를 두게 되었다.
한편, 1985년 4월 총리 파비위스(Fabius)가 프랑스 총리로는 처음으로 내한하였다.
참고 자료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3&dirId=130102&docId=36551650&qb=7ZWc6rWt6rO8IO2UhOuekeyKpOydmCDrrLjtmZTqtZDrpZg=&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RiJMGU5Y7uRssbrUnnhsssssstd-364606&sid=UZ7OtnJvLDcAAEj4yUY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logId=5636579&userId=michael9
http://www.ktv.go.kr/program/contents.jsp?cid=320995
http://www.newsmaker.or.kr/news/articleView.html?idxno=3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