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르트의 생애와 신학
- 최초 등록일
- 2017.12.06
- 최종 저작일
- 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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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칼바르트의 생애와, 칼바르트의 신학에 대해 10page로 요약정리한 문서입니다.
목차
Ⅰ. 생애
Ⅱ. 바르트 신학의 특징
Ⅲ. 로마서 강해
Ⅳ. 로마서 강해 제 2판(1922)에 나타난 칼바르트의 신학 사상
Ⅴ. 바르멘 신학선언
Ⅵ. 예정론
Ⅶ. 신론
Ⅷ. 창조론
Ⅸ. 화해론
X. 윤리학
XⅠ. 바르트 신학의 발전과 사회주의
본문내용
Ⅰ.생애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 했다. 바르트는 독일의 루터파 신학자가 아니고, 스위스의 개혁파 신학자였다. 바르트가 독일 교회의 신학적 아버지가 된 것은 1934년 5월31일에 발표된 히틀러(Adolf Hitler)에 저항하는 독일의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의 신학성명인 바르멘 신학선언(Barmer Theologische Erkarung)을 기초한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당시 바르트는 독일의 고백교회의 신학적 스승이었는데,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재건된 독일교회가 그들의 역사적 전통을 히틀러 시대의 독일의 고백 교회에 두기로 함에 ᄄᆞ라 자연스럽게 독일교회의 신학적 스승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바르트는 목회자와 신학자 가문에서 프리트 바르트와 안나 자토리우스 사이에서 3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4년 베른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독일의 베를린으로 옮겨서 신학공부를 계속 했다. 여기서 바르트는 당시 최고의 자유주의 신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아돌프 하르낙(Adolf von Harnack)교수의 강의를 열심히 들어 베를린의 풍경이나 문화생활에는 전혀 참여할수 없을 정도였다. 바르트의 아버지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기울어가는 것을 우려하여 튀빙엔 대학교로 옮기어 복음적이고 보수적인 신약학자인 아돌프 슐라터에게서 배우기를 바랐다.
튀빙엔으로 옮긴 바르트는 신학공부의 기쁨을 느낄수 없어 1908년 튀빙엔을 떠나 마부르크로 학교를 옮겨 하르낙과 쌍벽을 이루고 있었던 최고의 자유주의 신학자 빌헤름 헤르만의 심취했다. 계시는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 내부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계시는 인간의 인간성과 종교성 속에 내재하고 있다.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경험되는 인격적 신이지 객관화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이와같은 헤르만의 가르침은 젊은 바르트의 가슴 깊이 새겨졌고, 바르트는 자유주의 정신에 물든 신학자로 1909년 제네바로 돌아와서 제네바 개혁교회의 전도사가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