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성립과 민족사적 의의
- 최초 등록일
- 2017.12.20
- 최종 저작일
- 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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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渤海의 建國
2. 渤海의 發展
3. 渤海를 韓國史라 할 수 있는 根據
3-1. 政治, 社會的 側面
3-2. 文化的 側面
4. 渤海 認識에 대한 多樣한 見解
5. 渤海가 지니는 民族史的 意義
참고문헌
본문내용
1. 渤海의 建國
668년에 高句麗가 망한 뒤로 大同江에서 元山灣을 잇는 이남의 땅은 新羅가 차지하고, 그 이북의 땅과 遼東지방은 唐이 차지하여 安東都護府를 통해 지배했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과 신라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당은 676년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폐지하고, 요동지방에서 항거하던 고구려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당에 포로로 잡혀갔던 寶藏王과 그 후손들을 대대로 요동도독으로 임명했다. 이것이 小高句麗國이다. 말하자면 당의 지방제후로서 어느 정도 자치를 허용하면서 동방사회를 이간시키려는 정책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고구려인의 자각과 단결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동에서 소고구려를 중심으로 고구려인의 단결이 촉진되고 있을 때, 요서의 영주 지방으로 강제 이주된 고구려인과 契丹族, 靺鞨族 사회에서도 반란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698년에 거란족 李盡忠이 먼저 반란을 일으켜 이 지역에 대한 당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은 당의 입김이 적게 미치는 만주 동부지방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국가건설을 모색했다. 이주민집단 중에 乞乞仲象의 아들 大祚榮이 698년 지금의 길림성 돈화시 부근의 동모산 기슭에 세운 발해 (처음에는 震國)가 바로 그것이다.
2. 渤海의 發展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高王, 699~719)이 당 세력을 견제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잡아 2대 무왕(大武藝, 719~737)은 이를 기반으로 하여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무왕은 즉위하자 仁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당과는 대립관계를 취하였다. 즉, 당이 송화강과 흑룡강의 합류지역에 있던 黑水部靺鞨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長史라는 관리를 보내 통치하려 하자 무왕은 흑수부를 치는 한편 張文休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산동성 동주를 공격하여 刺史를 죽이기에 이르렀다(732). 이에 당은 신라와 함께 양면으로 발해를 공격하였지만 큰 추위와 눈으로 헛되이 물러가고 말았다(733). 이때 발해는 만주의 대부분과 연해주에 이르는 커다란 판도를 이룩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邊太燮,《韓國史通論》, 三英社, 2012, p118~p119, p138~p141
한영우,《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09, p147~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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