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비정신: 성리학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8.01.13
- 최종 저작일
- 2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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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유학의 수용과 계승
2. 성리학의 토대위에 세워진 조선
3. 성리학을 근본으로 한 선비정신
4. 대표적인 선비
Ⅲ. 결론: 오늘날 선비정신의 계승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우리 역사는 언제나 ‘선비’와 함께 해왔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한문을 도입하면서 유교이념이 함께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이념이 생활 속에 정착되면서 충절(忠節)과 신의(信義)를 지조로 삼아 지켜온 선비들이 출현하였다. 바로 이 선비들은 유교이념이 우리의 역사 속에서 피워낸 아름다운 꽃이요 충실한 열매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교이념은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며 발전을 거듭했고, 조선시대에는 국가 이념으로 채택되면서 선비는 국가의 지도층이 되었다. 이에 성리학이라 일컫는 도학(道學: 주자학)이 정통이념으로 되면서 성리학의 의리론은 선비정신의 중추를 이루었으며, 유교이념의 사회적 구현을 위한 근본원리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선비집단인 사림(士林)세력이 성장하고 사회를 주도하게 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그 시대의 영광이나 굴욕에는 모두 선비가 관여하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선비는 우리 역사의 공적에 대한 영예를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오에 대한 책임도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려 말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사대부들이 세운 조선이 건국초 선비들의 올바른 선비정신의 구현을 통해 찬란한 발전을 이루었다는 데 공적을 인정하는 한편, 조선 후기 선비들은 당파적 분열에 빠져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상대방의 부당성을 찾아내는 데 몰두하면서 첨예하게 대립한 당쟁 때문에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다는 식민사관이 일제에 의해 정착되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선비들의 당쟁이 조선을 어려움에 처하게 한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선비정신이 활발하게 살아 움직일 때 유교이념도 멀리 뿌리를 뻗고 넓게 가지를 치게 되었던 것이다. 반대로 선비가 관료의 지위나 지배계층의 신분으로서 특권에 젖어 자신들의 이익만 쫓아 당쟁을 일삼을 때에는 유교이념도 빚이 바랜 예법의 형식이나 봉건제도의 껍질 속에 굳어져 역사의 질곡이 될 뿐이었다.
참고 자료
금장태(2000), 한국의 선비와 선비 정신, 서울대학교출판부
금장태(2012), 선비의 가슴 속에 품은 하늘, 지식과교양
하우봉(2003), 선비의 나라 한국 유학 2천년, 한길사
한영우(2010), 한국선비지성사, 지식산업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비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