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라이벌 신숙주와 성삼문
- 최초 등록일
- 2018.01.23
- 최종 저작일
- 20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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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본문
1. 신숙주와 성삼문의 생애 및 활동
1) 신숙주의 생애 및 활동
2) 성삼문의 생애 및 활동
2. 신숙주와 성삼문의 현실인식
3. 신숙주와 성삼문에 대한 평가
Ⅲ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조선 건국이후 혼란했던 정국은 태종의 중앙집권정책과 세종의 문화사업 등으로 어느 정도 안정적 기반이 이루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세종이 죽고 병약한 문종의 단명 그리고 어린 단종의 즉위는 재상들의 ‘황표정사’와 같은 비정상적인 정국 운영을 초래했으며 수양대군의 주도로 계유정난이 일어나고 단종의 선위,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이어진다.
불안정한 사회에서는 변화에 민감한 사람이 득세할 수밖에 없었는데, 의리를 중시하는 선비들은 이렇게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을 소인배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 글에서는 이렇게 변화에 민감한 인물로서 신숙주를, 의리를 중시했던 인물로서 성삼문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고 학문에 열정이 있었던 인물들이다.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 벼슬을 시작한 이들은 사가독서를 계기로 더없이 친숙한 관계가 되었는데 두 사람은 매사에 서로 협력하는 절친한 친구임과 동시에 훌륭한 경쟁자가 되었다.
또한 두 사람은 세종의 기대와 총애를 받으며 훈민정음 창제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업적을 남겼으며, 시문은 당대 으뜸으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세종 말년에 명나라의 사신 예겸 등이 왔을 때 신숙주와 성삼문이 시문을 주고받으며 응대하여 큰 칭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친했지만 성격은 달랐는데, 성산문이 직선적이고 열정적인데 비해 신숙주는 침착하고 이지적이었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세종과 문종의 고명대신이었다.
문종에게 어린 단종을 잘 보필해 달하는 유언을 듣지만 둘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다.
문종이 단명하고 어린 단종이 즉위했을 때 둘의 사이가 갈라졌다.
성삼문은 충성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어린 단종의 지위를 지키고자 했고 신숙주는 충절보다는 현실적인 입장에서 왕권강화를 위해 세조의 왕위찬탈에 큰 역할을 한다.
성삼문은 결국 단종 복위 운동에 실패하여 고문을 당하다가 사형 당했고 신숙주는 이후에도 업적을 남기며 성종 6년 죽을 때까지 화려한 관직생활을 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신숙주와 성삼문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본론에서 이들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보고, 이들의 현실인식을 비교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에 대한 평가를 보도록 하겠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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