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사와미학 A+ /한국사진사/한국사진의조명/한국사진의유래/과거부터현재까지
- 최초 등록일
- 2018.02.28
- 최종 저작일
- 2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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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진사와미학 기말고사 a+과제입니다.
고퀄리티이며 분량도 많아 따로 찾아볼 필요도 없을 거라 생각됩니다ㅎㅎ
사진하나하나 설명하나하나 직접 찾아서 공들여 만든 과제입니다.
잘 사용하시면 분명히 a+받으실거에요! 실제로 a+받았습니다 ㅎㅎ
(마지막 느낀점은 꼭 본인의 생각으로 변경해서 사용하시길 권장드립니다!
느낀점은 개개인마다 다르니까요!)
목차
Ⅰ. 사진의 수용을 막은 쇄국정책
2. 중국에 의한 사진과의 접촉
3. 서양으로부터의 사진 접촉
4. 일본에 의한 사진과의 접
5. 의의
Ⅱ.사진의 수용
1. 사진의 수용과정
2. 사진술 연구
Ⅲ.사진의 사회화와 대중의 반응
1. 서양문물에 대한 부정적 시각
2. 배척의 대상이 된 사진관
3. 유언비어의 희생양이 된 사진관
4. 무기로 비춰졌던 카메라
5. 샤머니즘과의 갈등
Ⅳ.한국 사진의 도입과 사회적 작용
1. 원근법에 의한 조형방법의 시작
2. 사진의 도입이 완성된 시기
3. 사진의 사회적 기능 인식
4. 사진 영역의 변화
5. 사진과 정치
6. 시대의 증언자로서의 사진
Ⅴ.사진의 발달
1. 사진의 복제
2. 사진과 법
Ⅵ. 사진의 정착
1. 사진관의 정착
1. 사진사의 등장
Ⅶ. 한국 사진사를 알아보며 느낀 나의 생각
본문내용
우리나라의 사진 전래
Ⅰ. 사진의 수용을 막은 쇄국정책
조선에서는 대원군이 위정척사사상에 의거하여 단호한 쇄국정책으로 외래 자본주의 나라들의 침략을 저지하려 하였다. 대원군은 중국이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봉기 또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침공 등의 사건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된 것은 문호를 개방한 때문이라 믿었다. 때문에 조선왕조를 수호하는 방법은 국내 인민에 대한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대원군은 집권 첫 시기부터 청나라와의 사대적 외교관계 이외의 모든 대외관계를 차단하였다. 대원군은 당시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새로이 정권을 장악한 일본의 메이지정부를 서양 오랑캐와 같은 무리로 인정하고, 종래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전통적인 교린관계마저 거부해 버렸다.
따라서, 1840년대 국내 사정은 폐쇄정책을 실시해 외국과의 교섭을 차단해버리고 천주교를 박해하며 서양의 문물이나 과학기술의 유입을 금지하는 등 외래문화를 차단해버리는 쇄국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인근 국가에 수용되어 있던 사진은 국내로의 이입이 전혀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Ⅱ. 중국에 의한 사진과의 접촉
이러한 폐쇄시대에 문을 열고 교류하던 나라는 청나라가 유일했다. 조선은 청나라로 외교 사절단을 매년 보냈으며 그 사절단을 ‘연행사’ 라 불렀다. 1862년(철종 13년) 음력10월 연행단이 중국을 향해 떠났고 조선 정부 관리였던 이의익 등 당시 연행사 일행의 행적을 기록한 연행일기에 따르면 그들은 5개월여에 걸친 기간 동안 외교 업무를 보고 이듬해인 1863년 음력 1월 조선으로 돌아오기 전에 청의 수도 베이징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러시아 사진가에게 의뢰해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행 중 제일 고령이기도 하고 또 연행단의 정사였던 이의익이 독사진을 찍고 그 외의 수행원들도 모여서 촬영을 했다. 그때 찍은 사진들이 현재 런던대에 보관되어 있는데, 현재 전해 내려오는 사진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모델로 해서 찍은 최초의 사진들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