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명나라 시대의 상업발전이 가져온 다양한 변화
- 최초 등록일
- 2018.05.02
- 최종 저작일
- 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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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명대 쌀 생산과 유통
2. 명대 상인 집단의 등장
3. 장거정의 개혁과 상업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명나라(이하 명)에 관한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자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한족(漢族)이 몽골 족이 세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롭게 세운 통일 왕조(1368∼1644년)인 것이다. 이처럼 명을 설명할 때 꼭 붙는 수식어로는 ‘다시 일어난 유교 문화’, ‘한족이 다시 세운 나라’등이 있다. 명의 등장은 한족의 역사의 새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명을 건국 한 인물은 주원장, 가난한 떠돌이 소작농 출신인 주원장은 탁발승 생활 중 홍건적의 반란군을 만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자신의 군대를 만든 주원장은 성급히 원나라 조정과 싸우지 않고 강남 지방 평정에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원이 무너진 1368년, 주원을 통일하고 명을 건국한 것이다.
이로부터 약 300년간 상업의 부흥기와 함께 유지되었던 명나라, 명 나라의 상업은 중대 이후, 전국적 규모로 상인들의 집단이 등장한 것에 그 발전의 시작이라 본다. 필자는 명 나라 상업의 발전과 특징을 알 아 본 후 그것에 따른 국가 성장에 대해 제시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명대 쌀 생산과 유통
15세기 중엽 양자강 중류의 호광 (현재 호남, 호북) 지방은 최고의 곡창지대로 등장한다. 17세기 초 명을 여행한 어느 선교사는 중국인들에게서 호광 지방은 전국에 1년 치의 쌀을 제공하는 데 비해 나머지 지방 전체에서는 겨우 한 끼 먹을 정도의 쌀을 생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호광은 명의 대표 곡창지대였으며, 그 이유로는 명 초 이래 외제에서 이주해온 수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개간하고 제방을 쌓아 농업 생산력을 제고시킨 것에 있다고 한다.
호광지방은 인구가 적고 개발되지 않은 황무지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또한 개간지의 소유권을 인정받을 뿐 아니라 몇 년간은 세금도 면제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원적지에서만 세금을 물린다는 행정상의 맹점을 교묘히 이용하면 오랫동안 세금을 탈루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타향으로 이주한 자들은 이주지에서 호구 등록이나 세금 부담을 회피 할 수 있었다.
참고 자료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지음, 사계절, 2007
『쾌락의 혼돈- 중국 명대의 상업과 문화』, 티모시 브룩 지음, 강인황 옮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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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3100&cid=40942&categoryId=33397 - 명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8632&cid=59014&categoryId=59014 - 주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