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4.3사건은 한국 역사상 6.25 전쟁을 제외하고 단일 사건에서 가장 큰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뼈아픈 역사적 사건중 하나이다.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공식적으로 한라산 금족구역이 해제된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서 일어난 참혹한 학살극이다. 이념갈등이 발단이 되어 남로당 무장대, 미군정과 국군, 경찰이 민간인들을 학살했고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후엔 이념에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학살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조사된 희생자만 14,000명에 육박할 정도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피해자들은 아직까지 큰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민주화 이후에 4.3사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 지면서 추모와 진상규명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4.3사건 특별법 제정과 4.3 평화기념관 설치 등이 이루어지며 4.3사건에 대한 조치가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4.3사건 이후 피해 상황과 피해자들이 증언한 4.3사건, 진상규명이 이루어진 과정과 4.3사건에 대한 정부의 조치 등 4.3사건 그 후의 이야기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목차
1. 제주 4.3사건
1-1. 사라진 마을과 현재상황
1-2. 피해실태
1-3. 고문
1-4. 후유증과 연좌제
2. 4. 3사건 그 이후
2-1. 정부의 조치
2-2. 4.3특별법
2-3. 4.3평화기념관
3. 결론
본문내용
제주 4.3 사건
사라진 마을과 현재상황
강경진압작전
1948년 11월 중순 ~ 1949년 2월
제주도 중산간마을 거주자에게 통행금지 포고, 이를 위반시 이유불문하고 총살하겠다는 작전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 집단 살상
→ 마을 방화에 앞서 소개령을 내려 해안마을로 내려오도록 했음
일부 마을에는 소개령 전달이 안되었고, 혹은 전달 전에 진압군이 들이닥쳐 남녀노소 구분 없이 집단희생 당함
또한 중산간지대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함
그 결과, 중산간 마을 95%이상 방화됨
마을 자체가 없어진 “잃어버린 마을”이 109곳이나 됨
‘잃어버린 마을 표석’ 건립 마을
어우눌, 드르구릉, 영남마을, 다랑수마을, 궤뜨르, 무등이왓, 리생이, 빌레못, 자리왓, 빌레가름, 새나무곶, 새가름, 곤흘동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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