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황현
- 최초 등록일
- 2018.11.14
- 최종 저작일
- 20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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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몰락한 후손으로서의 출생과 성장기
2. 선비로서의 황현
3. 매천야록 : 당대의 비리와 사회상을 밝히다
4. 위정척사파로서의 황현
5. 을사늑약, 그리고 <오애시>
6. 황현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황현은 철종 ?년, 1855년 음력 12월 11일, 전남 광양군 봉감면 석사리 서석현(현 광양시 봉강면 서석촌)에서 아버지 황시묵과 어머니 풍천 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현의 위(諱) 이름의 다른 말.
는 현(玹), 자 이름의 다른 말.
는 운경(雲卿)이며 호는 매천이다. 위와 자는 아버지가 짓고, 매천이라는 호는 황현 스스로 지었다. 조선조 세종 대의 명재상 황희가 중흥조이고, 선조 대의 충청병사로서 임진왜란 당시 진주에서 크게 싸우다 전사한 무민공 황진이 파조이고, 인조 대 정언을 지낸 황위가 8대조이다. 하지만 황현 대에 이르기까지 7대 200여 년간은 특별히 관직에 나간 선대가 없어 명목만 사대부 집안이었을 뿐 그 실상은 몰락한 평민 가문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황현은 자질이 총명하고, 집에서 책읽기를 즐겨했다. 때문에 그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위해서 서책을 사 모았고, 아버지 역시 황현의 학문을 뒷바라지 했다. 그 덕분인지 황현은 학문적으로 매우 뛰어나 그 천재성이 인근에 소문날 정도였다. 이 시절 구례의 석학 왕석보(王錫輔) 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서당에서 글을 배웠는데 이와 동시에 시도 지었다. 그가 11세 때에 ‘안성초락유인석(雁聲初落遊人席)’라는 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이를 호남의 유자 노사 기정진이 보고 총기 있는 아이라고 하며 기특히 여겼다고 한다.
“소년 시절부터 시를 잘 짓는다 하여 벌써 향촌 사람들은 신동이라 하여 그를 우러러 보았다. 그가 14, 15세 때에는 글을 짓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하여 그의 총명함에 놀랐고, 소문이 더욱 멀리 퍼졌다. 17세가 되던 해에는 순천영(順天營)에서 열린 백일장에 출전했다. 백일장이 끝나고 밤에 영장(營將)을 찾았을 때 영장 윤명순이 의관을 풀고 발을 씻고 있었다. 매천은 절하지 아니하고 “내가 오지 않을 곳을 왔나보군.”하였다. 윤명순이 “그게 무슨 말인가.”고 꾸짖었다. 이에 어린 황현은 “소생이 비록 연소하나 선비이거늘 선비를 대함이 이같이 무례할 수 있습니까.”고 대꾸하였고, 이에 윤명순은 크게 웃으며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하였다 한다.
참고 자료
김영봉 역주, 『역주 황매천 시집 속 집』, 보고사, 2010, 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