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천안전공지묘’ 발견 경위와 관련내용
- 최초 등록일
- 2018.11.23
- 최종 저작일
- 20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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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장군천안전공지묘’ 발견 경위와 관련내용
(1) ‘장군천안전공지묘’ 발견 경위
(2) ‘장군천안전공지묘’ 가 전봉준 묘일 가능성 검토
3. 나오는 말
본문내용
1.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재판소는 법무아문 권설재판소(法務衙門 權設裁判所)로서 1894년 12월부터 의금부를 근대적으로 개편하여 1895년 3월까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근대사법재판제도가 출범한 후 우리나라에서의 최초의 사형선고는 1895년 3월 25일(양력 4월 19일)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되고 4일 후인 3월 29일 전봉준에게 내린 사형선고이다.
전봉준에게 내린 제 37호 판결선언서에 의하면 대전회통(大典會通) 형전(刑典) 중의 '군복을 입고 기마(騎馬)를 탄 채 관문에서 변란을 일으킨 자는 지체 없이 목을 벤다.(軍服騎馬作變官門者不待時斬)'라는 율(律)에 비추어 처죄(處罪)한 라고 선고하였다. 전봉준에게 사형을 언도한 재판관으로는 법무아문 대신 서광범(徐光範), 협판 이재정(李在正), 참의 장박(張博), 주사 김기조(金基肇), 오용묵(吳容默) 일본영사 영사 내전정추(內田定搥) 등이 있었다. 전봉준은 1895년 3월 30일(사형언도는 29일이었으나 실제 처형일은 그 다음날임) 동지인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 등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지니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2. ‘장군천안전공지묘’ 발견 경위와 관련내용
(1) ‘장군천안전공지묘’ 발견 경위
지난 2013년 8월 초, 지인으로부터 깜짝 놀랄만한 한통의 사진과 문자메세지가 전송되어 왔다. 정읍시 옹동면 비봉산 자락에 1미터 남짓 되는 크기의 화강암 비석이 있는데 장군천안전공지묘(將軍天安全公之墓)라 새겨져 있어 전봉준 장군의 무덤일 것이라는 제보가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는 생각과 그렇다 할지라도 설마 전봉준 장군 묘일 리가 있나 하는 마음으로 별 관심 없이 넘겼다. 그런데 두고두고 마음이 개운치 않고 애써 잊어버리려 해도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에 확인이라도 해봐야 마음이 편하겠다는 생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먼저 제보경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