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의 생애, 사상, 작품, 문학사적의의를 중심으로 한 고전작가연구
- 최초 등록일
- 2018.11.28
- 최종 저작일
- 20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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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매월당 김시습의 생애, 사상, 작품, 문학사적의의를 작품을 일부 인용하여 7페이지로 정리했습니다.
목차
1. 김시습 생애
2. 사상
2-1 유교사상
2-2 불교사상
2-3 도선사상
3. 작품
3-1 시작품
3-2 방외인문학
3-3 금오신화
4. 문학사적 의의
5. 출처
본문내용
김시습의 자는 얼경(悅卿)이며, 호는 매월당(梅月堂) 또는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벽산 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이라 하였으며 법호를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김시습은 세종 17년(1945)에 서울 명륜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는 강릉이 관향이지만 무반의 집안이었고 태어나면서 천품이 영민하여 일찍이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재질이 뛰어나 5세 때에는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을 만큼 특출하였고 또한 일화도 많이 남겼다.
김시습은 5세부터 13세까지 이계전의 문하와 당시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내며 후진교육에 전념한 김반의 문하, 그리고 조선조 초기 대학자인 윤상의 문하에서 학업을 정진하였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15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는 시골 외가로 가야 했으며 20세 때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의 부친의 병환과 계모를 맞이하면서 가세의 어려움을 겪으며 훈련원 도정 남효예의 딸에게 장가를 갔지만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북한산 중흥사로 들어갔다.
김시습이 중흥사로 들어가 수학 중 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은 대사건,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사건이 있었다. 그는 그 소식을 듣자 3일을 문을 닫고 밤새 대성통곡하였다. 그는 읽던 책을 불사르고 미친 척하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고 방랑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때의 심정을 술회한 것을 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하여 명리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서 시를 읊으며 즐기는 것을 자랑하곤 하였으며, 문필로 뛰어나서 관직에 오르는 것은 마음 속에 생각해 보지 아니 하였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를 행할 수 있으면서 곧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윤강(삼강오륜)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으면 홀로 그 몸을 지키는 것이 가하다. -매월당시사유록
참고 자료
황패강, 「한국문학작가론2」, 집문당, 2000
성낙희 교수 화갑 기념 논총간행위원회, 「한국문학과 사상」, 국학자료원, 2005
[네이버 지식백과] 김시습 [金時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조동일, 「한국문학통사2」, 지식산업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