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청궁 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9.03.24
- 최종 저작일
- 20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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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 관
Ⅱ. 건 립
Ⅲ. 구 조
① 장안당(長安堂)
② 곤녕합(坤寧閤)
③ 관문각(觀文閣)
본문내용
Ⅰ. 개 요
경복궁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남쪽으로는 향원정(香遠亭)을 바라보고 있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정치적인 무대가 된 곳으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고종이 이어(移御) 전까지 고종의 편전처럼 사용된 공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가설된 곳이기도 하며 외국의 건축가가 서양식 건물을 짓기도 한 곳이다. 한일합병 이후 이곳을 헐어 박물관과 미술관을 만들고 해방이후에는 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2003년부터 조사가 이루어져 2007년 복원작업을 끝내고 일반관광객에게 공개되고 있다.
Ⅱ. 건 립
고종이 즉위한 후 신정왕후가 대리청정을 하지만 실질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정권이 시작된다. 대원군을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법전인 경복궁을 10년의 시간을 걸쳐서 재건한다. 재건을 위한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한다. 이후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고 영건도감이 철수하고 공사가 마무리에 접어드는데 궁궐 북쪽에서는 여전히 공사가 지속된다. 부호군 강진규의 상소에서는 ‘건청궁을 짓는 일이 자뭇 크고 화려하다고 합니다. 이는 가끔 나가실 장소인데 저렇게 화려하게 지어 어디다 쓰시려고 비용을 지나치게 낭비하는 것입니까?’라며 고종을 나무라는데 고종은 이에 대해 ‘궐내에서 지출하고 해당관청에 맡기지 않는다.’며 계속 진행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좌의정 강로와 우의정 한혜원도 고종과 소대하는 자리에서 건청궁에 대해 언급하는데 대원군이 지시이며 창덕궁의 주합루(宙合樓)와 서향각(書香閣)을 본뜬 건물이라며 건청궁 건립을 옹호하고 있다.
이 상소들에서 고종은 신하와 흥선대원군 몰래 사비로 지었으며, 주합루와 서향각은 어진과 어필을 보관하는 장소로 건청궁의 건립목적을 들어내고 있으며 궁궐의 형식이 아닌 일반 양반가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건청궁(乾淸宮)이라는 이름이 명청대 황제의 침전의 이름으로 사용하였고 남쪽에는 향원정과 같은 후원시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창경궁 연경당(演慶堂)을 지은 순조, 헌종이 낙선재(樂善齋)를 지어 사랑채에 기거한 것 처럼 정무의 공간 보다는 휴식공간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 자료
단행본
건청궁, 찬란했던 왕조의 마지막 기억 : 100년 만의 복원 건청궁, 유홍준 김영철, 눌와, 2007.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인생도처유상수, 유홍준, 창비,2011.
전기역사를 찾아서 87회 - 근대조명 - 건청궁(乾淸宮)과 전등소(電燈所)의 `건달불` (2), 민병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2014.
보고서
경복궁 건청궁 중건보고서, 문화재청, 2006.
논문
景福宮 중건 이후 殿閣構成의 변화 : 「경복궁배치도」와 「北闕圖形」을 중심으로, 이혜원, 경기대학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