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논쟁의 전개, 그리고 결과 - 서인 입장에서
- 최초 등록일
- 2019.05.31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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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예송논쟁이란 무엇인가?
2. 예송논쟁의 발생배경
3. 예송논쟁의 전개
3.1 1차 예송논쟁
3.2 2차 예송논쟁
4. 예송논쟁의 의의
본문내용
1. 예송논쟁이란 무엇인가?
예송논쟁은 복제에 관해 서인과 남인이 논쟁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이 논쟁은 1·2차로 나뉘는데 1차 예송논쟁은 왕이 죽었을 때, 어머니의 복제에 관한 것이고 2차 예송논쟁은 며느리의 사망 때에 시어머니의 복제에 관한 것이다.
우선 1차 예송논쟁의 대강은 이렇다.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이며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가 대행왕(大行王)을 위하여 무슨 복(服)을 입어야 옳으냐 하는 의논이 일어났다. 이 때 서인인 송시열과 송준길 두 사람은 기년복(朞年服 : 朞年說)을 주장하고 남인인 윤휴와 허목은 삼년복(三年服 : 三年說)을 주장하였다. 조정은 ‘기년설’을 채용하여 그대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반박과 변명은 여러 번에 걸쳐 되풀이 되었다. 현종 재임기간 15년(1660~1674)과 1679년경까지 전후 약 20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보통으로 예설(禮設)을 가지고 말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당쟁적 감정으로 중상을 주로 하였다.
2차 예송논쟁은 현종 15년 2월 현종의 비(妃)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죽으면서 시작됐다. 1차 예송논쟁의 당사자였던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그 때까지 살아있었으므로 또다시 그녀의 복제문제가 대두됐다.
2. 예송논쟁의 발생 배경
예송논쟁의 발생배경은 그 복제에 관한 틀을 만든 예학의 발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율곡 이이 이래로 주자학의 연구 경향은 예학에 치중됐다. 이이의 학통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김장생이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은 예학(禮學)이었다. 그래서 김장생(金長生)을 조선 예학의 태두라고 일컫는데 김장생이 예학 이론을 수립하는데 일조한 인물은 우습게도 노비로 환천될 뻔 한 송익필이었다.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과 김집의 제자인 송시열과 송준길에 이르러 한국 성리학의 주류는 거의 예학이 차지하다시피했다.
이들은 스승인 율곡의 사상의 핵심인 개혁 사상은 사장시켜버리고 예학만을 받들어 수구적인 정치이론을 전재한 인물들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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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국역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