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부석사 무량수전
- 최초 등록일
- 2019.07.10
- 최종 저작일
- 20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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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부석사 무량수전
3. 배치형식
4.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5. 무량수전 팔작지붕
6. 무량수전 주심포형식
7. 도면
8. 무량수전 귀솟음
9. 결론
본문내용
서론
전은 1916년의 해체, 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1376년 중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조수법이나 세부양식이 묵서명 연대의 건물로는 볼 수 없고, 적어도 13세기 초까지 올려볼 수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같은 경내에 있는 조사당이 1377년에 건립되었다는 묵서명이 나왔고, 이 건물과 비교할 때 100년 내지 150년 정도 앞섰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인 부석사 무량수전에 대해 조사를 하였다.
무량수전과 화암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의 유래 및 역사
국보 제 18호인 무량수전은 당나라에 유학 온 의상대사를 짝사랑하던 "선묘"는 그와의 사랑을 이루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그의 목석같은 마음과 변함없는 불심에 탄복해 스님에 귀의하게 이르게 된다. 10 여년 후, 깨달음을 얻은 의상대사는 귀국길에 오르기 전 "선묘"를 찾아갔지만 없어 결국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뒤늦게 달려온 "선묘"는 통곡을 하며 바닷물에 몸을 던져 용이 되었다. 그녀는 용이 되어 의상대사의 귀국길을 보호했다. 귀국 이후, 의상대사는 왕의 명을 받들어 절을 세우게 됐는데, 다른 종파들의 방해가 굉장히 심했다. 그러자 "선묘"는 큰 바윗돌로 변하여 그 종파의 머리 위에서 위협하여 방해를 뿌리뽑았다. 그렇게 영원히 뜬 바위가 된 "선묘"를 기리기 위해 의상대사는 그 절의 이름을 "부석사"로 정했다. 통일신라시대 676년(문무왕16년)2월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 되었으며 경문왕대(861~874)에 신림의 제자들이 부석사 화엄종 후 고려 말 진각국사 원응이 무량수전과 조사당 중건하였다. 1916년 무량수전,조사당 해체수리 하였고, 1977~1980년 일주문,천왕문,숭당등 새로 세웠다.
배치형식
부석사의 전체적인 지형적 공간구조는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부석사의 가람배치는 대부분 남서향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무량수전과 무량수전과 같은 기단에 위치한 안양루는 부석사경내 대부분의 당우들과는 다르게 남향을 하고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