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학자 마리 퀴리와 로잘린드 프랭클린
- 최초 등록일
- 2019.07.31
- 최종 저작일
- 20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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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첫머리
2. 유년기
3. 교육
4. 갈등
5. 성차별
6. 죽음
7. 마무리
본문내용
[첫머리]
여성과학자로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마리 퀴리이다. 2개의 노벨상을 수상하였으며 퀴리 가문에 5개의 노벨상이 있을 정도로 본인과 그 자녀들까지 탁월하고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그에 반면, 비운의 여성과학자로 알려진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낸 것의 숨은 공로자이다. 일찍 사망한 탓에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노벨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여성의 권위가 매우 낮았던 시절, 여성과학자에 대한 성차별을 극복하고 과학적 재능을 뚜렷이 나타내며 과학사의 한 획을 그은 두 여성과학자를 비교하려 한다.
[유년기]
마리 살로메 스클로도프스카는 1867년 폴란드에서 태어난다. 1남4녀 중 막내딸로, 부모님이 둘 다 교사이며 진지하고 열정적인 가톨릭 신자였다. 마리 퀴리는 수학과 물리학 교사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리학 교육을 처음 받는다. 그러나 러시아 통치 하에 억압받던 폴란드에서 러시아 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게 된다. 어머니는 직장을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전향하고 아버지도 학교를 전근하였다. 어머니는 그녀의 결핵이 옮을까 봐 입맞춤이나 포옹을 해주지 않았고, 어린 마리 퀴리는 어머니가 거리를 두는 것에 상처를 받았다. 경제적 형편이 점점 어려워지자 집에 남자 기숙학교를 차리게 되는데, 그 이후로 집은 편안하고 휴식을 위한 집이 아닌, 눈치를 보고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집으로 변했다. 마리 퀴리가 9살 때 기숙 중이던 남학생이 걸린 발진티푸스에 전염되어 언니인 소피가 14살의 나이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또한 이듬해 어머니 또한 결핵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이러한 충격의 연속으로 마리 퀴리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예만하게 변한다. 이러한 러시아 지배 아래에서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 폴란드 인으로서, 가난을 견디고 언니와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마리 퀴리에게 불안감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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