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앙의 법치주의
- 최초 등록일
- 2019.10.11
- 최종 저작일
- 20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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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상앙의 법치주의"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상앙의 생애
2. 상앙의 인간관
3. 사회규범과 정치제도
4. 상앙에 대한 평가
참고문헌
본문내용
상앙(商鞅, 359~338)의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앙(鞅)이며, 위앙(衛鞅)으로 불렸다. 그가 위앙으로 불리는 것은 위(衛)나라 왕의 첩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상앙은 어려서부터 형명학(形名學, 법률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위나라 재상 공숙좌(公叔座)의 가신(家臣, 높은 벼슬아치의 집에 딸려 있으면서 그 벼슬아치를 받드는 사람)이 되었다. 공숙좌는 상앙의 능력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그를 혜왕에게 천거하였으나 좀처럼 벼슬길이 열리지 않았다. 공숙좌는 죽기 얼마 전 병석에서 혜왕에게 간언하기를 “소신이 죽거든 공손앙을 등용하십시오. 만일 등용하지 않으시려거든 그가 다른 나라로 가지 못하도록 죽여 없애야 하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혜왕에게 한 말을 공손앙에게 전달하고는 멀리 도망가서 목숨을 구할 것을 권했다. 공손앙은 공숙좌의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만약 혜왕이 자신을 재상으로 등용하라는 당신의 조언을 듣지 않는다면 자신을 죽이라는 조언도 듣지 않을 것이라며 위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예견대로 혜왕은 공손앙을 죽이지 않았다.
기원전 361년 효공이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했다. 당시 진나라는 국력이 쇠퇴하고, 이웃 나라에서도 오랑캐로 배척당하는 등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효공은 동쪽의 잃은 땅을 되찾고 진나라를 무시했던 다른 제후국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공손앙은 진(秦)나라로 진나라로 건너가 효공의 측근인 환관 경감(景監)에게 접근했다. 공손앙은 경감을 통해 효공을 만났으나 효공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공손앙이 효공을 네 번째로 알현했을 때 이렇게 건의했다. “진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먼저 낡은 법률과 제도를 개혁해야 합니다.” 여러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효공은 공손앙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를 등용시켰다. 효공은 공손앙을 좌서장(左庶長, 12등급 가운데 6등급 정도인 벼슬)으로 삼아 법률과 제도를 개정하는 정치 개혁에 착수했다.
참고 자료
상앙 지음, 신동준 옮김, 《상군서》, 인간사랑, 2013.
홍문숙, 홍정숙 지음,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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