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코뮌 - 여성의 혁명 활동을 중심으로 -
- 최초 등록일
- 2019.11.15
- 최종 저작일
- 2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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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파리코뮌 - 여성의 혁명 활동을 중심으로 -"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식량폭동’ 과 경제적 불만의 해결 추구
2. 혁명적 선동과 내부 적에 대한 감시
3. 군사적 역할의 추구 및 행사
4. 시민권의 추구 및 행사
5. 대표적인 혁명 활동가
1) 루이스 미셸(Louise Michel)
2) 엘리자베스 드미트리예바, 안나 바실리예프나 콜먼
Ⅲ. 결 론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Ⅰ. 서 론
파리 시의회는 나폴레옹 3세의 보불전쟁에서의 패배에서 오는 좌절감과 독일의 파리 포위전으로 인한 탈진감에서 ‘파리코뮌(Paris Commune)’을 구성하였다. 코뮌이 내세운 강령은 민주주의와 연방주의였다. 그 중 코뮌의 직접민주주의 핵심을 이룬 것은 여성들이었다. 여성들의 참여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에서 시작된다.
여성들은 식량폭동이라는 전통적인 저항형태를 통한 경제적 불만의 표출과 혁명전쟁에 대한 남성들의 참여 독려 및 국내 반혁명분자의 색출작업, 공화국 시민으로서 남성들과 동등한 시민권의 추구, 그리고 이런 시민권 추구와 연관된 적극적인 군사적 역할의 시도로 구분된다. 그 이후 19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여러 혁명들에서 여성의 활동은 프랑스대혁명에서 보여진 이런 네 가지 범주의 여성 역할 내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1871년 파리코뮌의 여성 활동 역시 이런 네 가지 범주에 입각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 론
1. ‘식량폭동’ 과 경제적 불만의 해결 추구
여성들이 혁명이나 반란에 연루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정치적이거나 군사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식량이나 경제적 빈곤 문제 때문이었다. 그것은 19세기 말까지도 여성들이 가정의 식량 공급을 책임지고 특히 아이 양육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제문제와 관련된 여성 행동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식량폭동이었다. 1789년 10월 5일 베르사유로의 행진 역시 여성이 벌인 최초의 대표적 집단행동으로, 식량폭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 및 도시화의 결과로 19세기 중반을 경과하면서 경제적 불만의 내용이 식량문제에서 집세나 실업 및 임금 문제로 바뀌게 되었다. 파리코뮌에서 식량폭동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1870년의 프랑스ㆍ프로이센 전쟁 과정에서 약 6개월 정도의 포위상태를 겪은 파리는 극심한 식량 부족 상태에 있었음에도 식량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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