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개화사상
- 최초 등록일
- 2003.07.22
- 최종 저작일
- 2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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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세기의 개화 사상
목차
1.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2. 명성황후의 개화사상
3. 온건개화파
4. 급진개화파
5. 위정척사
6. 동학농민운동
본문내용
[흥선대원군의 쇄국 외교]
19세기 후반기는 산업혁명을 거친 서구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의 확보를 위해 본격적으로 동양에 진출하는 시기였다. 이에 잦아진 이양선(異樣船)의 출몰과 양이(洋夷)에 대한 위기 의식으로 흥선대원군 치하의 조선 정부는 중국 및 일본과 전통적인 사대교린 정책(事大交隣政策)을 고수하는 한편, 서양에 대해서는 쇄국양이 정책을 취하였다.
서양과의 통상·외교를 거부하는 쇄국정책은 서양의 무력 침략은 물론 유교 질서를 부정하는 서학(西學: 주로 천주교)의 침투를 막으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대원군은 1860년대에 조선과 접경하게 된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해왔을 때, 천주교 신자 남종삼(南鍾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국 및 프랑스의 세력을 동원,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책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계획을 포기하고 그 대신 정부 내의 보수주의자와 유학자들의 위정척사론을 받아들여,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에 대해 문호를 폐쇄하고 국내의 천주교도들을 탄합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이러한 쇄국 및 천주교 박해정책은 ‘은둔국 조선’에 대한 프랑스 및 미국이 무력 행사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로 프랑스와 미국 함대의 도전을 받았으나,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