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송강 정철의 생애 및 창작배경
2. 송강가사 분석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2.1 <사미인곡(思美人曲)>
2.2 <속미인곡(續美人曲)>
2.3 <사미인곡> <속미인곡> 비교
3. 송강가사의 문학사적 의의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송강 정철은 시조와 가사 모두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에 이르면 국문시가가 작품 수, 표현기교, 취급방식에 있어서 한시 못지않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그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이러한 송강의 작품들은 송강과 동시대를 살았던 인사들을 비롯한 조선조의 많은 품평가(品評家)들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 오늘날의 연구자들로부터 한결같이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송강의 작품 중에서도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김만중과 홍만종 등에게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 표현에 있어 극찬을 받았다.
이 글에서는 이렇게 조선 후기 최고라고 평가받고 있는 송강의 작품 중에서도 <사미인곡>, <속미인곡>에 대하여 살펴보려한다. 먼저 두 작품을 자세히 다루기에 앞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 어떠한 배경에서 창작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송강의 생애를 살펴보고 이어서 두 작품에 대한 분석과 비교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작품에 대한 당대인의 평가와 함께 송강작품의 의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Ⅰ. 본론
1. 송강 정철의 생애 및 창작배경
정철[鄭澈, 1536(중종 31)~1593(선조26)]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다. 서울 장의동(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으로 돈녕부판관 유침(惟沈)의 아들이다. 어려서 인종(仁宗)의 귀인인 큰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로 인하여 궁중에 출입하여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과 친숙해졌다. 10세가 되던 1545년(명종 즉위 원년)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맏형은 장류(杖流) 중에 죽고, 부 유침은 유배를 가게 되자, 그도 관북(關北), 정평(定平), 연일 등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1551년에야 해배(解配)되어 조부(祖父)의 산소가 있는 전남 담양 당지산 아래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 년간 지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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