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녀 비형랑 강독
- 최초 등록일
- 2003.10.06
- 최종 저작일
-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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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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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桃花女 鼻刑郞
도화녀 비형랑
第二十五 舍輪王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는 진지왕의 이름으로 사륜(舍輪) 혹은 금륜(金輪)이라고 한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도부인이다.
諡 『삼국사기』에서 지증왕 때부터 신라의 시호법이 나타납니다. (지증왕 15년 이해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다. 신라의 시호법은 이때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국호와 왕의 칭호가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지증왕 4년 (503)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新)이란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羅)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거니와,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좇았다.
眞智大王 姓金氏 妃起烏 김기흥, 「도화녀, 비형랑 설화의 역사적 진실」, 논문에서는 ‘기오공은 왕의 장인치고는 갈문왕이 아닌 양 기록되고 있는 바, 일단은 전승 기록상의 착오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동륜이 태자로서 성골인 자신의 고모와 결혼하고 있었던데서 어쩌면 비슷한 연배의 미혼의 성골녀가 없어 사륜은 왕자인데도 불구하고 진골녀 정도와 혼인할 수 밖에 없었을 가능송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렇게 된다면 왕의 장인이라하여도 신분적 한계로 갈문왕으로 봉해 질 수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혹은 그의 폐위와 관련하여 장인이 성골이었다 하여도 갈문왕 지위가 박탈되고 어쩌면 죽음을 당했을 가능성조차 부인할 수도 없을 일인만큼 후대 신라의 사가는 그를 갈문왕으로 기록할 수는 없는 일이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서는 ‘기오공은 지도부인의 아버지로 8세 풍월주인 문노와 사촌형제 간이었다. 기오는 소지왕의 왕비 선혜왕후의 사자(남편이 아니 다른 남자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다. 진흥왕의 왕비 사도부인의 자매인 흥도낭주와 결혼하여 지도부인을 낳았다. 그리고 문노는 비조부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공주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동안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으나, 어머니가 가야국 공주라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다. 그러나 진지왕이 폐위됨에 따라 공을 인정받아 아찬의 벼슬로 승진 된 뒤엔 국선화랑의 지위까지 올랐다. 문노때에 화랑도의 기풍이 크게 일어났으며 통일의 대업이 싹트게 되었다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참고 자료
김기흥, 「도화녀 비형랑 설화의 역사적 진실」논문
삼국사기, 삼국유사, 한국민속백과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