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 독립전쟁(1910~1920년대 만주의 독립군 활동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20.04.23
- 최종 저작일
- 20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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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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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1910~1920년대 이전의 국내·국외의 정세
1) 국내정세
2) 국외정세
Ⅲ. 봉오동·청산리전투
1)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진입작전
2) 봉오동전투
3) 간도침공 및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
4) 청산리전투
Ⅳ. 봉오동·청산리전투 이후 독립군이 처한 상황
1) 간도참변(間島慘變)
2)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Ⅴ 나가며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통해 개항을 했던 조선(朝鮮)은 서양 열강들과 일본의 의해 많은 조약과 이권을 침탈당한다. 그중 일본은 이권을 빼앗는 것과 함께 조선의 내정간섭을 일삼으면서 각종 제도들을 시행하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능한 관리들을 비판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려는 반봉건·반외세의 성격을 가진 의병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활발하게 전개해 나갔으나 부족한 화력과 의병사이의 신분적 문제 등의 이유로 실패를 맞이한다.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이뤄지고 많은 조선인들이 간도(間島), 만주(滿洲), 연해주(沿海州)로 이동하면서 주거지를 형성하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독립군을 결성하여 항일독립전쟁을 주도해간다. 이번 발제에서는 한일합병을 기점으로 국내와 국외의 독립군 활동과 봉오동(鳳梧桐)·청산리(靑山裏)전투 이후의 독립군의 상황를 알아보고자 한다.
Ⅱ. 1910~1920년대 이전의 국내·국외의 정세.
1) 국내정세.
1910년 이전까지 대한제국(大韓帝國) 내에서는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1895년 단발령(斷髮令)의 실시와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인해 일어난 을미의병(乙未義兵),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체결로 일어난 을사의병(乙巳義兵),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계기로 일어난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전개되어 나갔다. 하지만 1909년 일제는 의병활동을 근절하려는 목적과 의병을 지원하는 백성들을 철저히 탄압하고자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감행한다. 주로 삼남지방의 의병들을 토벌하는데 주력하여 삼남지방 의병들이 초토화 되어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은 점차 세력이 축소된다. 남한대토벌 작전을 통해 전국 의병세력을 약화시킨 일제는 식민지지배의 기초를 구축해 나갔고, 1910년 한일합병(韓日合倂)을 체결하게 된다.
합방이후에는 중부 이북지역에서 소규모의 전투를 전개하여 헌병분견소‧경찰서‧국경수비대를 습격하고 일부 친일 지주(地主)나 부호(富戶) 등도 습격하여 투쟁을 이어나갔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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