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광무개혁 논쟁
- 최초 등록일
- 2020.04.27
- 최종 저작일
- 2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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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현대사]광무개혁 논쟁"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광무개혁
2. 광무개혁에 대한 평가
1) 부정적 평가
2) 긍정적 평가
3) 이분법적 논리에 대한 문제제기
3. 평가
본문내용
1896년부터 고종 및 대한제국 정부의 집권층이 주도한 근대적 개혁을 광무개혁이라 한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에 등극하고 이 개혁이 집중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고종황제의 연호인 ‘광무’를 따서 ‘광무개혁’이라고 부른다.
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 전까지 보수파가 주도하였다. 정부정책의 기본 방향은 ‘구본신참’, 즉 구식을 근본으로 삼고 신식을 참고한다는 정책이념을 추구했다. 한 마디로 복고주의적이었다. 각종 제사와 음력 사용을 복구하고 단발령을 취소하였으며, 중앙과 지방제도를 과거의 것으로 개편하였다는 점에서 복고주의적인 성향이 드러난다.
그러나 모든 조치가 과거로 회귀하는 방향이었던 것은 아니다. 각종 제사와 음력 사용이 일부 복구되었지만 향사제도에 국한되었고, 모든 의식이 복구된 것도, 양력이 모두 음력으로 복구된 것도 아니었다. 단발령도 일시적으로 취소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다. 도제도 복구되었지만 갑오경장 이전의 8도와 이후의 23부를 절충한 1부 13도 체제였다. 관리의 구성도 23부 당시와 비슷했으며, 복구된 의정부제도도 내각제도의 취지와 내용을 살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권강화의 측면에서는 복고주의적인 성향이 크게 나타났다. 고종은 환궁 이후 1897년 10월 칭제건원을 제가하고,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 국가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꾸며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대한국 국제」가 제정·반포되었다. 이것에 의하면 황제는 무한불가침의 군권을 향유하며, 입법·사법·행전·사전·강화·계엄·해엄에 관한 권한을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격하된 왕권의 지위를 복고시키는 한편 구미국가의 절대왕정체제를 모방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법제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전제왕권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황실의 재정도 확대되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각종 잡세가 부활되었고, 광산사업..
<중 략>
참고 자료
李玟源 『대한제국의 성립과 「광무개혁」, 독립협회에 대한 연구성과 과제』, 『韓國史硏究의 回顧와 展望 Ⅲ』국사편찬위원회, 1995.12.30, p.243~290
송병기, 『광무개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5118,2019-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