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제국 질서의 동요
- 최초 등록일
- 2020.06.01
- 최종 저작일
- 20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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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화제국 질서의 동요"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청불전쟁과 그 영향
1. 청불대립의 배경
2. 청불간의 교섭과 무력충돌
3. 천진조약과 그 영향
Ⅱ. 청일전쟁과 그 결과
1. 조선을 둘러싼 청일의 대립
2. 청일전쟁의 경과
3. 하관조약과 그 결과
Ⅲ. 맺음말
본문내용
청조가 양무운동을 통해 명예회복을 꾀했는데도 대만사건과 마가리 사건으로 대외적인 이미지가 손상을 입었다. 1880년대에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략했는데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내세우면서 프랑스와 대립각을 세웠다. 프랑스는 중국이 자국의 선교사를 사형시켰다는 이유로 제 2차 중영전쟁에 참가했었다. 마찬가지로 베트남에서도 선교사 피살을 이유삼아 1862년 2월에 제 1차 사이공조약을 체결했다. 제 1차 사이공조약으로 프랑스는 베트남으로부터 코친차이나 동부 3성과 곤륜도를 획득하고 1867년에는 코친차이나 서부 3성을 병합해버렸다. 1873년에는 프랑스인 밀수혐의자에게 추방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송코이델타지역 일대를 점령하고 1874년 3월에 제 2차 사이공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코친차이나 6성에 대해 주권을 부여받았다. 사실상 베트남이 프랑스의 지배국으로 전락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 때 프랑스는 베트남이 일체의 외국으로부터 어떤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전제를 걸었는데 이는 곧 청나라와 베트남의 조공-책봉 관계를 부정한 것이었다.
청나라는 1875년 5월 프랑스로부터 조약내용을 통고받았다. 당연히 청나라는 베트남이 프랑스의 종속국이란 사실을 인정하지도 승인하지도 않았다. 1880년 사덕제가 중국에 조공사절을 보내며 원조를 요청하자 베트남 모색을 두고 청나라 조정내에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거세졌다. 한편 프랑스가 사이공조약의 체결이후 베트남에 군사를 파견하여 방비를 강화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청나라는 대만사건 이후 거듭되는 외교난제로 프랑스와 전면전을 치를 형편이 되지 않았다. 초반에는 중국인과 베트남인 의용군을 지원하여 프랑스군을 견제할 뿐 이었다. 그러다가 1870년 후반부터 이들 의용군이 프랑스인의 운남통상을 방해하고 1881년에는 하노이로 이동하여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