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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의 간행』"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해인사(海印寺)
3. 국내외 정세와『대장경』의 간행
1)『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제작 당시 국내외 상황
2)『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제작 당시 국내외 상황
3)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의 간행
4. 고려대장경의 의의
5.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11세기, 성종(成宗) 12년인 993년 10월부터 시작된 30년 동안의 거란의 3차례에 걸친 침입부터 13세기 몽골의 침입까지 고려는 계속해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특히 몽골의 침입 때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백성들의 삶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백성들의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다. 불심이 깊은 나라였던 고려는 부처의 말씀을 새긴『대장경(大藏經)』을 통해 적들이 물러나기를 소망했다.
고려 역사에 중요한 한 획을 그었던 고려대장경의 간행은 최씨 정권의 종교라는 공통점을 찾아 단합을 꾀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대몽항쟁기의 백성들 사이에 퍼진 왕성한 민족의식, 문화의식에 힘입어 지속될 수 있었다.
본 발제문에서는 당시『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이 간행되던 시기의 국내와 국외의 전후 상황과 대해 우선 알아보자 한다. 또한 고려대장경의 내용에 대해 알아볼 것이며 나아가 과거와 현재의 관점에서 고려대장경의 의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해인사(海印寺)
해인사가 위치한 해발 1,430m의 가야산은 경남 합천과 경북 성주에 걸쳐 있다. 예로부터 골이 깊어 전란의 화가 미치지 않는 곳이라 하여 고대부터 많은 사찰이 세워졌는데 해인사도 그 중 하나이다.
해인사는 최치원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과『삼국유사(三國遺事)』의상전교조(義湘傳敎條)의 화엄십찰(華嚴十刹)로서 화엄종의 정신적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종교적 무게를 지니는 사찰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으로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이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802년에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하였다는 기사를 남기고 있으나 최치원의『신라가야산해인사산안주원벽기(新羅迦耶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에 전하는 해인사 창건 기록을 엮어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 자료
『三國遺事』
『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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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唐代薦福寺故寺主翻經大德法藏和尙傳」, 譯註崔致遠全集2, 아세아문화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