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한산도 대첩과 진주성 대첩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20.06.08
- 최종 저작일
- 20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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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진왜란(한산도 대첩과 진주성 대첩을 중심으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과 일본의 상황
1) 조선의 정세
2) 일본의 정세
3. 왜란의 전개
1) 임진왜란
2) 정유재란
4. 한산도 대첩
1) 전투의 전개
2) 한산도 대첩의 의의
5. 진주성 대첩
1) 진주성
2) 진주성 전투
3) 진주성대첩의 의의
4) 제2차 진주성전투와 진주성 함락
6.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1592년, 한 세기가 넘는 혹독한 내전시대를 이겨내고 전국시대 통일을 이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에게 명을 치러 갈 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하였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강력한 전력으로 한 달도 되지 않아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였다.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고 기록된 7년 동안 계속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동북아 정세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명과 조선 그리고 일본, 이 삼국은 이전에는 겪지 못했던 큰 변화로 인해 상당한 혼란을 수습하여야했다. 이렇듯 강력한 여파를 남긴 임진왜란을 전쟁의 흐름을 바꾼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과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과 일본의 상황
1) 조선의 정세
조선의 대내외적 의식은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보면 알 수 있다. 지도의 중심에 중국이 자리 잡고 있고 조선은 중국의 절반의 크기로 매우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다. 일본은 아주 조그맣고 멀리 떨어져 있으며 만주는 거의 표현되지 않았다. 이는 조선의 입장에서 여진족과 일본에 대한 인식이 아주 미미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 건국 이후 계속 된 평화로 주변국에 대한 위기에 대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고 국력을 국내에 한정짓고 있었다.
이후 조선은 16세기에 들어 정치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다. 4차의 사화(士禍)를 겪은 이후 사림세력이 훈구세력을 억누르고 정치의 주류가 되어 새로운 중앙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사림은 선조 8년에 이르러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1575년 동서 분당으로 분당정치가 시작 된 이후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사건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에 연루되어 크게 희생되었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2013.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 아름다운날, 2007.
전국역사교사모임, 처음 읽는 일본사, 휴머니스트, 2013.
전쟁기념사업회, 한민족 역대 전쟁사, 행림출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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