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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에 대한 도상학적 분석 (A+)"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마라의 생애
Ⅲ. 다비드의 시선과 연출
1. 그리스도의 오마주
2. 암살과 배신의 상징, 코르데
3. 조작과 연출
Ⅳ. 또 다른 시선들
Ⅴ. 나가며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도판 1)은 1793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현재 벨기에 왕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예술에 심취한 다비드는 신고전주의 양식을 탐구했으며, 역사적 사건을 강렬하고 엄숙하게 표현함으로써 미술계에 새로운 지표를 만들었다. 그는 특히 프랑스 혁명 당시 급진 정책을 대변하는 자코뱅 당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작품을 정치적 선전의 수단으로 활용했는데, 그 대표작이 <마라의 죽음>이다. 정치적 사건을 이상적으로 미화한 <마라의 죽음>에 대해 잰슨(Horst Wolrdmar Janson)은 “이 고전적인 그림은 자신의 목숨을 바친 영웅의 최후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본 글에서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에 대해 형식분석에 근거한 도상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본 연구의 최종 목표는 ‘마라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역사적 차원으로, 마라를 고귀한 정신의 순교자로 승격시키기 위해 다비드가 설정한 시각적 장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비드의 시선에 입각하여 작품을 조망하고, 미술사적 선례를 종합하여 본래적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비드가 여타 작가들 보다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보여줬던 만큼 다비드의 시선과 대립하는 또 다른 시선들 속에서 등장인물을 이해하고자 한다.
Ⅱ. 마라의 생애
작품 속 유일한 등장인물인 장 폴 마라(Jean-Paul Marat)는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의 선두에 섰던 혁명가로 로베스 피에르, 다비드와 함께 자코뱅 당의 당원으로 활동했다. 1972년 자코뱅파와 반-혁명 세력인 지롱드파의 충돌이 심화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유혈사태로 전개되었고, 결론적으로 마라가 속한 자코뱅파가 지롱드파를 처단함으로써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792년 9월 지롱드파 국민 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했으며, 마라는 저널 『인민의 벗 L’AMI DU PEUPLE』을 발간하면서 민중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마라는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3 당시 이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선봉자였으며 반-혁명세력이 모두 단두대 위에 서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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