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명말·청초의 시기(16~18세기)는 단순한 왕조교체 시기가 아니고 사회적 격변기였다. 그 이유는 첫째, 향촌질서의 재편과정을 통해서 사회구조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향촌질서의 유지를 위해 명초에서 실시한 이갑제는 양세법 체계와 종래의 공동체 유제를 존속시키면서 호 단위로 편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명 중기 이후 여러 면에서 사회적 모순이 진행되면서 이갑제가 해체되어 갔다. 명·청 양조 국가권력은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향촌질서의 유지와 안정을 시도했다. 향촌질서의 개편은 신사의 사회지배력을 이용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둘째는 인구이동 면을 살폈다. 명 중기에 이갑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하는 시기부터 청 중기까지 두 번에 걸쳐 대대적인 인구이동이 있었고, 그에 따라 전국의 인구분포가 재편되었다. 이동방향은 선진 경제지역→낙후지역, 농촌지역→금산구역, 농촌지역→도시·수공업지역으로 이동했다. 그 이동의 결과 중국의 농업경제 구조가 변화되었다. 셋째, 명대의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배경으로 하여 명말·청초에는 강남지방의 직물업 외에도 각 분야에서 상품생산이 전개되었는데, 강남지방에서는 도시 직물업의 발달에 영향을 받아 농촌의 소농민도 위기에 처한 농가경영을 보충하기 위해 직물업에 참여했다. 그 결과 농촌의 직물업도 크게 발달하였는데 그에 따라 강남의 도시와 농촌에서 생활터전을 얻으려는 외래 인구가 집중되었다. 소농민이나 전문 수공업자는 대상인이나 고리대의 수탈하에서도 서서히 자립성을 제고시켜 갔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서 강남사회에서는 신분적 지위의 고하를 불문하고 정치와 사회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형성되었으니, 그 상징적 표현이 민변이었다. 한편, 서민들의 지위향상의 노력도 끈질기게 계속되었고 또 상당히 제고되기도 했다. 그 상징적 표현이 항조와 노변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민변, 항조, 노변은 명말·청초에 강남에서의 사회 변화의 소산인 동시에 상징적 현상이었었다고 할 수 있다.
목차
Ⅰ. 서언(序言)
Ⅱ. 향촌질서(鄕村秩序)의 해체(解體)와 재편(再編)
1. 이갑제질서(里甲制秩序)의 해체
2. 향촌질서의 재편
Ⅲ. 인구의 이동과 그 영향
1. 인구이동의 실상
2. 인구이동의 영향
1) 농업생산의 제고(提高)
2) 중소도시의 발달
Ⅳ. 상업생산의 전개와 그 영향
1. 상품생산의 전개
1) 면직물업(綿織物業)의 전개
2) 견직물업(絹織物業)의 전개
2. 민변(民變), 항조(抗租), 노변(奴變)
1) 민변
2) 항조
3) 노변
Ⅴ. 결어(結語)
본문내용
세계의 역사학계에서는 송대로부터 아편전쟁 이전의 청대 중엽까지(10세기중엽~19세기중엽)의 900여 년간을 기본적으로 동질적인 사회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위와 같은 기본전제는 인정하면서도, 명말․청초의 시기(16세기~18세기)는 하나의 역사적인 획기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1960년 이래 대두되기 시작하여, 금일에는 거의 공통된 인식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즉, 토지제도와 부․역제도의 변화, 사회구조의 변화, 상품생산의 전개 등 세가지 측면의 변화가 동시에 진행되었고 그 때가 마침 왕조교체기와 중첩된다는 의미에서 명말․청초획기론(明末․淸初劃期論)이 나타난 것이다.
본고에서는 특히 다음 문제를 중점적으로 분석, 정리해 보겠다. 첫째 향촌질석의 재편을 중심으로 한 사회구조의 변화 측면, 둘째 인구이동과 인구분포의 재편과정에서 나타난 경제구조의 재편적 측면, 셋째 상품생산의 전개 중에서 특히 강남지방의 직물업의 내용과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역사적 성격 등을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이 시기의 사회변화가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를 음미해 볼 것이다.
참고 자료
1. 윤은정 「明末 鄕紳에 關한 硏究」, 忠南大學校, 1992
2. 이창은 「明末 開讀之變(1626)에 對한 一硏究: 東林黨 彈壓에 對한 士民의 對應을 中心으로」, 漢陽大學校, 1991
3. 오금성 『명말·淸初社會의 照明』, 한울, 1990
4. 김선혜, 『淸初地丁銀制 改革에 대한 一考察』, 淑明女子大學校, 1994
5.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講座 中國史 Ⅳ』, 지식산업사, 1989